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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written text Sep 11. 2024

엄마가 이 세상에 계셨네 02

1.

작고 침침한 방이었다. 네다섯 살 때 기억은 여전히 그 방에 웅크려있다. 병든 엄마 곁에서. 너무 어려서 엄마가 아픈지도 몰랐다. 그저 엄마 품에 안겨 있었을 뿐이다.


2.

아빠는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병든 아내가 내온 점심 상을 드셨다. 밥은 깨끗하게 비스듬히 깎아서 드셨다. 아빠는 점심을 드시고 옆으로 돌아누운 엄마의 엉덩이에 주사를 놓았다. 아빠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일을 가시면, 남긴 밥은 엄마와 내가 먹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 어린 누나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3.

그때 엄마 곁에 누워있다가 나는 두둥실 허공에 떠올라, 누워 있는 엄마와 그 옆에 있는 나를 바라본 적이 있다. 유체이탈이라는 신비한 체험인지 그저 선잠에 들어 꾼 꿈인지 알 수는 없다.


4.   

어느 날 밤을 기억한다. 컴컴한 단칸방에 엄마와 어린 누나들은 잠들어 있었지만 아빠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어둠에 잠긴 아빠의 커다란 등이 쌀포대 같았다. 아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빠는 내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나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러고는 이웃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내가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게 해 주셨다. 환한 듯 침침한 노란 백열구 전등 불빛 아래에서 나는 콘티 빵 하나랑 장난감을 골랐다.


5.

빵 봉지에는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한 인디언 소녀 얼굴이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한글을 읽을 수 없는 나이였음에도 그것이 콘티 빵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다.


6.

아빠는 나를 등에 업은 채 가게 밖으로 나와 어둠 속에서 한참 서 계셨다. 봄밤이었다. 대전시 소제동 대동천가 어느 버드나무 밑이었다.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는 연녹색이었다. 봄바람은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서늘했다. 그래서 아빠의 커다란 등은 더 따뜻했다. 나는 잠이 올 것만 같았다.


7.

그 당시의 아빠는 말수 적고 조용하고 깊은 사람이었다. 그때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쩐 일인지 나는 슬퍼진다.


8.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당시 우리 가족은 살던 집에서 내쫓겼다. 집주인이 셋방에서 송장을 칠 수 없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소제동에서 천동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9.

이사한 동네에서 기적적으로 엄마의 폐결핵은 치유되었다. 용한 무당이 이사할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엄마는 평생 이사 방향이 좋아서 그때 병이 나았다고 믿으셨다.


10.

건강을 회복한 엄마는 일을 나가기 시작하셨다. 내게 기억은 없지만 된장을 팔거나 풀빵을 팔기도 하셨다. 목공소를 다니시기도 했고 친척의 소개로 아동전집출판사의 외판원이 되기도 하셨다. 그때의 기억은 있는데, 집에 떼어놓고 일을 나가기에 내가 너무 어렸던 탓에, 종종 엄마가 일터까지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엄마의 영업 실적은 형편없었다. 자존심 강하고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성격 탓이었다.


11.    

이후 엄마는 여관 청소부, 파출부, 건물청소부로 일평생을 사셨다. 돌아가시기 반년 전까지도.


12.

엄마가 일흔 살을 맞이하셨을 때,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을 여행한 적이 있다. 엄마가 태어난 도쿄와 인근 온천 여행지, 바다를 둘러보았다. 엄마와 떠난 첫 여행이었다.

엄마에게는 비행기를 타는 것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청소한 호텔에 묵는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는 좋아하셨다.


13.

내가 초등학교 3학년 혹은 4학년 때 나의 아빠, 그러니까 남편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예전에는 입에도 안 대던 술을 배웠고,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났으며 술에 취해 아내를 때렸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한 폭력이었다.


14.    

아빠가 술을 배우고 가정 폭력에 취한 건 분명 그 사건 이후였다. 나에게는 할아버지, 아빠에게는 아버지인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우리의 그 가난한 집을 찾았던 일, 바로 그 일 이후였다. 아빠는 다섯 살에 엄마를 잃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아빠의 아버지란 사람은 죽은 아내로부터 낳은 자식들은 버려둔 채, 딴살림을 차려 일생을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 나에게 있어 할아버지라는 그 사람이 죽을 때가 되자 아빠의 배 다른 형제들이 장남 노릇하라며 죽기 직전의 노인을 보낸 것이다. 그래, 그랬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이전의 말수 적고 깊었던 아빠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15.

아빠의 폭력이 시작되고 나서 일이 년이 안 되었을 무렵, 어느 하루를 나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꽁꽁 숨겨 담아두고 있다. 엄마는 밤새도록 구타를 당했고, 누나들도 나도 울면서 밤을 보낸, 그런 수많은 하루들 중 하루였다. 그날 엄마는 일을 나가지 못하셨다. 엄마는 아침에 등교하는 나에게 도시락을 내미셨다. 엄마의 얼굴은 멍과 부기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열어보니, 어묵 반찬이 있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대체로 도시락 반찬이 언제나 김치나 김무침이었는데, 급우들 앞에서 당당히 도시락 뚜껑을 열고 먹을 수 있는 그런 호사스러운 반찬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침에 본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도시락을 먹을 수 없었다. 구역질이 났고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16.   

사춘기 이후 어느 정도 체격이 되자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힘으로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화물회사 하역 노동으로 다져진 아빠를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밤을 새워 이빠가 엄마를 때리지 못하게 씨름했고, 학교에서는 너무 피곤해 잠만 잤다. 시험 전날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용케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여 그 지옥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들을 그렇지 못했다.


17.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이 년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쓰러졌다. 나는 아버지가 어서 죽기를 바랐다.    


18.

거동이 불편한 남편의 머리맡에 두유와 카스텔라 빵각각 두 개를 두고 엄마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 나갔다. 지방 은행에 다니다 IMF 사태로 일 자리를 빼앗긴 둘째 딸이 가뭄에 단비 같은 도움을 주었지만, 생계와 간병을 위해 일을 쉴 수는 없었다. 하루 종일 허리와 목이 휘도록 페인트 찌꺼기를 제거하고 늦은 저녁 집에 돌아오면, 몸져누운 남편은 너무도 많은, 지저분하고 고된 일거리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19.

그렇게 일 년 여 세월이 지나 추석 날 나의 아빠, 아버지 그리고 엄마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20.

충청남도 예산 어느 시골, 집성촌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엄마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 친척집을 떠돌며 머슴 생활로 끼니를 채우고, 성년이 되어 광부로 일하다 지방 도시로 일용 노동자로 흘러들어온 청년. 뒤늦게 배운 술로 그 모든 시절에 대해 앙갚음하려는 듯, 폭력으로 변모한 그의 고독으로 아내의 삶을 망치고, 아이들의 영혼을 산산조각 낸 어떤 사내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21.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함께 엄마가 일하던 아파트 공사 현장을 찾은 적이 있다. 임금 체불이 있었던 모양이다. 분명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였으나, 나에겐 거대하고도 음산한 폐허처럼 느껴졌다. 잠시 엄마를 따라갈까 망설였으나 그러지 않았다. 엄마의 작은 몸은 그 거대한 폐허의 중심에 자리한 소실점으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22.

그 풍경은 나를 변화시켰다. 그 이후로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다.


23.   

어릴 적, 엄마가 나를 떠날까 두려우면서도 엄마가 매일같이 아빠에게 맞는 것이 싫어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가길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다. 그러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24.

평생의 지옥이었던 남편을 떠나보낸 그 시점, 엄마의 심장은 고장 나 있었다. 이제 노년이 되어 외롭고 쓸쓸한 삶이 시작되었다. 일요일 저녁이면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나 아들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언제 오느냐고 아들을 재촉한다. 아들이 오는 날이 달력에 표시되어 있었다. 노년의 엄마에게는 그날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고 의미였다.


25.

칠순을 맞아 아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로 엄마의 건강은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아들은 네덜란드 소년이 되어 댐의 구멍을 막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아들은 어떻게 하든 엄마와 다시 한번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회사 사장님께서는 호의를 베풀어 퇴사 대신 3개월의 휴직 기간을 주었다.


26.

아들은 엄마와 함께 일본보다 더 먼 캐나다로 여행을 떠났다. 2016년 5월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자연 풍경을 좋아했다. 캐나다 록키 산맥의 풍광을 보면서 엄마는 어린 소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 적 본 산이며 들이며 개울과는 다른,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도 그 풍경을 하나라도 놓칠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7.

그러나 그때 이미 엄마의 심장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있었다.


28.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여름, 병원에서 잠시 퇴원한 엄마는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 아들을 위해 김을 굽고 있었다.


29.

그리고 그해 겨울, 새해를 살짝 넘긴 어느 날 밤 눈송이 같은 마지막 숨을 내뱉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30.

내 어머니의 일생이다. 내 어머니의 일생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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