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뀐 날을 기념하고자 합니다(D-62)
생일(生日, Birthday)이라 함은 사람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입니다.
어떤 사람은 양력으로 어떤 사람은 음력으로 생일을 기념하지만, 일 년에 딱 한 번만 있는 날이지요.
그런데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생일을 변경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현행법상 생년월일을 바꾸려면 당사자가 정정 서류를 마련해 관할 법원에 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냥 신고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청자가 현재의 생년월일이 틀렸다고 증명해 줄 서류(초등학교 생활기록부/족보/돌사진 등)를 제출해야 하고, 출생 당시 상황을 증언해 줄 만한 지인 등의 증언도 참고 자료로 활용이 됩니다. 이와 같이 제출된 서류와 증언을 토대로 심사를 진행하고, 법원장의 최종 승인으로 허가 여부가 결정되는데 기각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하네요.
아내의 생일도 원래는 음력으로 9월 28일인데, 2년 전부터 생일을 양력 10월 31일로 바꾸었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생년월일을 바꾼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끼리 정한 새로운 생일이지요.
청천벽력(靑天霹靂)
2년 전인 2023년 10월 4일, 아내가 늘 다니던 종합병원에서 복부 CT 촬영도 포함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2주 뒤, 검사결과를 들으러 병원을 찾은 아내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 벌여졌습니다. 단지 건강검진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으러 갔을 뿐인데, 갑자기 추가 상담을 필요하다며 소화기내과로 바로 연결하였다고 합니다.
얼떨결에 찾은 소화기내과 진료실에 들어선 아내는 담당의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복부 CT를 분석해 보니 췌장암입니다. 단순히 의심되는 정도가 아니라, 99% 췌장암이 확실하니, 상급병원에 가시든지, 아니면 여기서 MRI를 찍어보시죠"라고 했답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는데...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하려고 했지만 떨리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어이없어하는 것을 전화기 너머로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아내의 '췌장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는데, 당사자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도 상상이 안 갑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진단받은 병원에서 추가로 MRI를 찍을 것인가 아니면 상급종합병원으로 갈 것인가, 그리고 간다면 어느 상급종합병원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췌장암 진단과 치료에 전문성이 높은 병원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을 했고, 아내에게 서울대병원으로 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결정을 빨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진단한 종합병원(2차 병원)과 상급종합병원 간에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었는지, 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연결이 되어 관련 자료가 신속하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다음 날 서울대병원에서 현재 상황에 대한 심층 상담받을 수 있었고, 1주일 뒤에 '폐와 복부 CT 및 MRI'를 찍게 되었습니다.
CT나 MRI 촬영을 하려면 예약 후 3개월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인데, 때마침 예약이 취소된 건이 있다는 간호사분의 긴급한 연락을 받고, 망설임 없이 무조건 OK를 했지요.
그렇게 '폐와 복부 CT 및 MRI'를 찍은 후, 결과는 1주일 뒤 나온다고 합니다. 이제는 기다림만 있을 뿐입니다.
하루, 한시, 일 분, 일 초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감정 속에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혹시... 오진이겠지... 만약... 맞다면... 그럼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반복됩니다.
일을 하고 있어도 밥을 먹고 있어도 잠을 자고 있어도, 계속 무한반복되는 '희망과 절망의 교차'...
다시 태어난 기쁨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바로 오늘(2023.10.31일)이 진단 결과가 나오는 날입니다.
아내와 딸은 처형과 함께 차를 타고 병원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출발하여 판교에서 근무 중인 아들을 태우고 병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가는 내내 "괜찮을 거야, 이전 병원에서 오진을 했을 거야"라는 생각과 이야기를 수없이 하고 또 했습니다.
병원 대기실에서 가족이 모두 모여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도 삼 년같이 길게 느껴진다"라는 뜻인데 대기실에 있는 시간이 정말 그랬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는 지금, 희망과 불안,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감정 속에서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내의 이름이 전광판에 떴습니다.
가족들 모두,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
진료실에서 처음 만난 의사분의 첫마디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데...
"가족분들이 걱정되셔서 모두 오셨네요.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그동안의 불안과 고통을 일순간에 녹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보니 췌장암이 아니라 '담도 양성혹 또는 담도과오종'이네요"
"아마 전에 진단하였던 병원에서 CT 영상으로만 보고 췌장암으로 판단하신 것 같은데, MRI로 보니 담도 형상이 기형적 구조라 그렇게 보신 것 같습니다. 암이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족 모두가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전 여기까지는 정확히 듣고 나머지는 우느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가끔 담도의 형상이 기형적인 구조인 경우가 있는데, 환자분도 그런 경우입니다. 암은 아닙니다"
"다만 혹의 형상이나 크기에 변화가 있을 수 있으니, 6개월마다 검사를 해서 경과를 지켜보고, 이후에는 1년에 한 번 정도씩 정기검사를 받으시면 됩니다"
솔직히 정확한 워딩을 적은 게 아니고, 나중에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의 기억을 조각 맞춤하면서 나온 것이지요.
몇 번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진료실을 나온 후 대기실에서도 한참을 끌어안고 또 울었습니다. 정말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모든 분들이 저희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지요.
간호사분의 "축하드립니다"라는 따뜻한 말과 다음번 예약을 위한 안내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생일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 중 하나입니다.
대학로를 지나 청계천으로 향하는 길,
막히는 모든 도로조차 좋았고,
비가 내려도 좋았고,
무엇보다 기쁨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기에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바로 이날이 10월의 마지막 날인 31일이며, 아내의 새로운 생일이 된 것이지요.
그날을 생각하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잠시 잊고 살았는데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니 새삼스레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인생의 동반자'
'아내'... 나의 안(속)의 해(태양)이자 나머지 '반쪽'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을 때이고
같이 늙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