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도 그때의 아픔이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D-65)
장인 어른 병문안을 다녀 오는 길에, 문득 오래된 아픈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아버지의 직장이 갑작스럽게 서울에서 용인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용인으로 내려가시고, 저만 서울에 있는 할머니 댁에게 맡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때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로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저도 부모님을 따라 내려가겠다고 생떼를 쓰거나 매달린 기억은 없습니다.
왜 가만이 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후회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인생의 암흑기
마포국민학교에서 성산국민학교로 전학을 온 이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치 그 시절의 일기장이 통째로 찢겨나간 듯한 느낌입니다. 몇몇 기억의 조각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웃음이나 따뜻함보다는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어린 마음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감정들이 더 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가정기록부를 작성해 오라고 숙제가 있었습니다. 글을 모르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도와주실 수 없었고, 저는 답답한 마음에 속이 꽉 막히는 듯했습니다. 본적, 부모님의 신상정보, 가정환경 같은 항목들은 국민학생인 제게는 너무 낯설고 어려운 것들이었지요.
고민 끝에 결국 토요일 오후, 저는 혼자 버스를 타고 용인에 계신 부모님 집으로 향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혼자 먼 길을 떠난다는 건 큰 결심이었지만, 그때의 저는 그저 이 답답함을 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집에 도착한 저를 보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작은 숙제 하나 때문에 먼 길을 달려온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셨지요. 그날의 부모님 표정은 지금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 집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돌이켜보면 약 8년이라는 시간을 부모님과 떨어져 외롭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조차 선명하지 않습니다. 마치 '음력 그믐날의 어둠'처럼, 빛 하나 없이 깊고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기를 '제 인생의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가족이 다시 모인 것만으로도 기쁨입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중요한 시기를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지내다 보니, 제 성격은 자연스럽게 내성적이고 소심한 방향으로 굳어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았고, 마음을 표현하는 일도 조심스러웠습니다.
대학생활과 군 복무를 거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더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고, 책임을 맡으며 외면적으로는 훨씬 단단해졌지만, 여전히 제 근간에는 조용하고 소심한 성향이 남아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 시절의 외로움과 고요함은 제 성격의 뿌리가 되었고, 지금의 저를 형성한 중요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때로는 그 내성적인 면이 저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전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회사도 문을 닫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아버지로부터 공부를 못 한다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서울에서 열심히 공부하리라 기대하셨는데, 학교 성적표를 보시고는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꾸중이 서운하기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제게 관심을 갖고,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습니다. "무관심보다는 악플이 낫다"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네요.
온 가족이 다시 함께 살게 되면서, 마치 짙게 깔린 안개가 걷힌 듯 기억들이 또렷합니다. 물론 여전히 어렵고 힘든 상황은 이전과 똑같았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 제가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원들과 면담이나 상담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부득이하게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을 때면, 저는 꼭 제 이야기를 해줍니다.
저는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시절을 '제 인생의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어린아이는 부모와 함께 자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고, 그 외로움과 막막함은 지금까지도 제 안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과거의 아픈 기억에 떠올라 잠시 글쓰기를 멈췄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아련함이 감정이 밀려옵니다.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제가 죽어서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를 혼자 놔두고 가셨던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상처였습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