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스며드는 배려의 색
라는 말만 몇주 째. 30대 여자 셋은 육아와 집안일과 업무에 시달리느라 도무지 여행 계획을 짤 시간이 없었다. 예약한 것은 도쿄에 가는 비행기표와 내 한 몸 뉘일 숙소 뿐. '이거 계획 하나도 안 짜서 어떡하지?' 라는 마음 반,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 반으로 비행기에 올라탄다. 이륙 전 막간을 틈타 계획을 러프하게 세우기 시작한다. 구글맵 리스트에는 인스타그램에서 '#도쿄맛집'을 검색해서 무지성으로 등록해놓은 별들이 수십개다. 비슷한 지역끼리 묶어서 일정을 짜본다. 그 중에는 한 달 전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맛집도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걸 일일히 확인할 수가 없다.
"어쨌든 처음 맞는 아침으로는 우동을 먹자! 우리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웨이팅이 길다는 우동 맛집이 있으니 오픈런하면 되겠어!"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 가쓰오부시 향이 나는 깊고 뜨끈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코와 혀를 스쳐 지나간다. 우동의 맛을 상상하는 것 자체로 이미 일본에 와 있는 것 같다. 좋았어. 내일 아침은 우동이야.
다음 날 아침, 여자 셋은 빙빙 도는 머리를 움켜쥐며 일어난다. 도착하자마자 시부야의 밤거리에서 새벽 3시까지 열심히 쇼츄와 맥주를 들이켰기 때문이다. 좀비처럼 일어나 우동집 오픈런을 준비한다. 이럴 때는 글쎄, 이게 누구를 위한 여행인지 약간의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겨우 휴가를 맞춰서 온 해외여행에서는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 조차 사치이다. 열심히 숙취를 가리는 메이크업을 하고 길을 나선다. 우동집 오픈은 11시다. 사실 아침식사를 위한 오픈런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시간이지만, 우리에게는 적당히 부지런(?)떨기 좋은 시간이었다. 약간의 숙취가 남은 여자 셋은 꼬르륵대는 배를 움켜쥐고 경보로 15분을 걸어 우동집에 도착했다.
골목에서부터 보이는 맛집의 향기! 나무기둥 사이에 있는 출입문 앞으로 노란색 천이 펄럭이고, 그 앞에 남성 두 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역시. 숙취는 좀 있어도 부지런 떨길 잘했네. 하고 줄을 서본다. 우리 2등으로 먹는건가? 훗, 역시 의지의 한국인. 하고 출입문 앞에 있는 아이패드를 확인한다.
'174分、41チーム'
"174분..? 41팀..????"
눈이 동그래진 여자 셋을 향해 뒤에 있던 남자들이 이야기한다.
"저희가 8시반쯤 와서 웨이팅해서, 5번째로 먹어요."
3초간의 정적. 도쿄의 봄바람이 살랑 불며 머리카락을 흐트려트린다. 그제서야 술이 살짝 깨면서 블로그에서 봤던 글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음식과 술을 허락하지 않는 곳, ...도쿄.'
망연자실한 여자 셋은 길가에 서서 잠시 작전 회의를 한다. 먹깨비를 실컷 부리러 왔는데 첫 맛집부터 실패라니. 어떡할까? 진짜 세 시간이나 걸릴까? 일단 기다리자! 그래 뭐. 그러면 너무 배고프니까 뭐라도 요기를 좀 하고 있을까? 대신 너무 배불리 먹지는 말자! 우동을 맛있게 먹으려면 배고픈 상태를 조금 유지해야해! 일본은 편의점 샌드위치도 맛있잖아. 그리고 주변에 저장해둔 당고 집이 있어.
여자 셋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고, 근처에 있는 당고집에 가서 당고를 사서 공원에 앉아 피크닉 감성으로 주린 배를 달래며 우동을 기다리기로 한다. 하지만, 당고집은 생각보다 멀었고, 여행까지 왔는데 길거리에서 대충 음식을 먹기는 싫다는 이유로 공원을 찾아가는 길에 지치고 말았다. 게다가 공원 가는 길에 잠시 들린 문구점에서 초집중력을 발휘하여 팝업카드와 다꾸용 도장을 고르고 나니, (30대 여자 셋이 문구점에서 14만원어치나 샀다) 더 선명해진 하나의 사실... 배가 무진장 고프다는 것. 아니, 두개의 사실, 우리에게는 어제의 숙취까지 더해져 있다는 것.
여자 셋은 길거리에서 다시 작전 회의에 들어간다.
"잠시, 생각해보자. 세시간 걸려서 먹는다고 치면, 아직도 두 시간 남았어. 근데 나 머리가 핑 돌 것 같아."
순간, 바로 옆에 길거리에 나와있는 테이블에서 소바를 먹는 일본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부서지는 도쿄의 아침 햇살을 받으며 먹는 소바라…, 우리는 홀린듯 소바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번의 메뉴 작전 회의를 거친 후에 냉소바 1개, 온소바 1개, 가츠동을 시킨다. 15분 정도 기다리니 짧은 커트 머리의 여사장님이 허스키 하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はい、どうぞ (하이, 도오조!)" 여자셋은 답한다. "頂きます。(이타다키마스!)"
소바는 맑은 갈색 국물과 회갈색의 소바면, 그 위에 살며시 올라앉은 파가 다였다. 배고픔을 못이기고 급하게 들어온 집이였지만, 도쿄에서 먹는 첫 아침 식사인만큼 기대하며 미니 국자로 첫 국물을 떴다.
'후룹-.'
난 이런 맛을 '미시무시하다'고 한다. 달지도, 짜지도, 시지도 않은 미시무시한 맛이었다. 여자 셋은 말없이 후루룩 후루룩 먹기만 했다. 얘들도 나랑 같은 생각일까?라고 생각만 하면서 국물을 한 국자, 두 국자, 세 국자, 나중에는 대접째 마셨다. 처음에는 달고 짜고 새콤한 한국식 소바를 시대했기에 싱겁다고 느꼈지만, 마실수록 국물의 고소함과 구수함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소바면의 고소함도 느껴졌다.
배가 좀 차고 나니, 그제서야 친구 뒤로 도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쾌청한 도쿄의 봄 하늘 아래로 단정하고 안정적인 도쿄의 건물들이 보였다. 누구 하나 키가 크거나 작지도 않고 튀지도 않는 장면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였던 것은 모든 건물들이 '그레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뉴트럴한 컬러들이었다. 이후에도 도쿄를 걸어다니며 본 건물들은 대부분이 물빠진 저채도의 자연스러운 색이였다.
직업병이 발동해 도쿄의 경관색채계획을 찾아보았다. 역시나 도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건축물 외관의 주조색을 채도 14중 4 이하로 지정하고 있었다. 그 이유인즉슨, 오래된 전통을 가진 건축물의 색채를 해치지 않는 밝은 무채색이나 난색계 위주의 저채도로 구성해야한다는 것이였다. 게다가 건물과 함께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나무 역시 저채도의 색을 띄고 있었다. 섬나라 특유의 온난습윤한 도쿄 기후에서 잘 자라는 느티나무, 벚나무, 은행나무가 모양은 다를지언정 애쉬(Ash)빛의 몸통색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의 볼륨이 줄어든 도쿄의 색채는 도쿄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인 나 마저도 편하게 이 도시에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것은 전체를 중요시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에서 그것을 듣기만 했을 때는 마치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으나, 실제로 그 도시에 가니, '튀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남을 위해 '배려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와닿았다.
일본인들의 배려문화는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에서도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일례로, 일본인들은 '스미마생'을 크레센도로 발성한다. 낯선 이의 시간을 방해하면서 말을 거는 것 자체를 매우 '스미마생(미안)'해하면서, 그 마음을 억양에 담은 것이다. 언뜻 들으면 '(스미마)생↗️'만 들릴정도로 조심스러운 말투였던 것이다. 이 말투가 매우 인상적인 나머지, 우리의 이번 여행 최고의 유행어는 '(스미마)생'이 되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는 한국에서보다 많은 눈치를 보게 해서 처음에는 불편하기도 했으나, 이내 이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가 묻어있는 태도임을 발견하고, 나 역시 이 사람들로부터 배려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말투와 행동을 조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도쿄에서의 차분하고 조용한 공간들은 특히나 그 적막 속에서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존중은 조화로 이어진다. 내가 돋보이기 위해서 나의 색을 진하게 주장하는 것 보다는 나로 인해 타인의 색이 영향을 받을까 조심한다. 조화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은 식문화에서도 나타난다. 우연히 들어간 소바집에서의 담백한 소바국물이나, 매우 달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고 역시 달지 않고 맛있었다. 특히나 시그니처인 조청맛 당고는 약간의 짭조름한 맛, 약간의 단 맛, 그리고 입에서 사라지는 부드럽고 쫀득한 맛의 조화가 정말 일본스러웠다. 그 외 3박 4일 동안 먹은 모든 음식이 부드러운 식감과 조화를 이루는 향과 맛에 집중되어 있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몬자야키는 잘게 다진 양배추와 명란, 타코야키에 들어가는 달콤한 밀가루 반죽과 각종 토핑을 볶아 먹는 철판 요리인데, 이것 역시 종업원들의 숙련된 철판질(?)로 재료들이 아주 잘게 다져져서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적이었다. 이 외에도 구름을 먹은 듯이 입에 넣자마자 녹아버린 오모테산도 수플레 팬케익, 입안 가득 퍼지는 씁쓸한 향이 매력적이던 말차 라떼, 고기가 맞나 싶게 잘게 다져진 함바그 스테이크, 날계란물에 적셔먹는 공기밥, 편의점에서 파는 타마고 샌드와 후르츠 샌드까지 모든 음식이 이유식에 버금가는 부드러운 목넘김을 갖고 있었다. 매운맛과 짠맛과 신맛이 서로 내가 이 음식의 맛을 지배하겠다며 싸우는 자극적인 맛이 아니었다. 약간의 단 맛을 더 잘 살려줄 정도의 간, 음식에 은은한 여운을 남겨줄 정도의 산미가 조화를 이루는 '조화'와 '배려'가 느껴지는 맛이었다.
소바 그릇에 국물까지 싹 비운 여자 셋은 얼큰한 신라면이 아니라, 이렇게 담백하고 깔끔한 맛으로도 해장이 된다니 신기하다. 따듯한 소바를 먹고 어느정도 해장이 되고 나니, 어젯밤이 생각난다.
"근데, 어제 그 사장님이 우리한테 내일 와서 결제해도 된다고 한 거. 신기하지 않아?"
어젯 밤, 우리가 저녁을 해결한 1.5평정도 되는 작은 꼬치집에서는 현금 결제만 가능했다. 60대로 보이는 현지인 사장님은 난감해하는 우리에게 현금이 없다면 내일 와서 줘도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처음 보는 한국인 여자 3명을 어디를 보고 믿은 것일까?
"근데, 나 예전에 후쿠오카 갔을 때도, 200엔이 모자르다고 했더니 그냥 보내주더라고. 은근히 인심이 후하고 정도 있어, 일본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도쿄를 차가운 무채색의 도시라고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무채색은
차갑고 시린 쿨그레이가 아닌, 서로를 위한 차분한 배려가 담겨있는 웜 그레이에 가까운 뉴트럴 그레이에 가깝다. 남에게 관심이 없고 냉정한 것이 아닌, 침묵과 차분함 속에 담겨져 있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느낀다면 한층 더 따뜻하고 편안한 도쿄 여행이 될 수 있다.
엄청나게 유명하고 번쩍한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예약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 느낀다.
여자 셋은 그렇게 조용히, 따듯하게 도쿄에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