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색 바로 알기
살면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색은 뭘까? 하늘색, 물색, 태양빛, 어둠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살색Flesh Color'은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 알람을 끌 때, 자연스럽게 내 손을 보게 되고, 세수를 할 때 거울의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지하철을 타서는 더 많은 '살색'을 마주하고, 사무실에 가서는 동료 얼굴의 '살색'과 이야기를 나눈다.
여름방학 숙제로 그림일기를 그릴 때, 언니와 나는 주말에 갔던 수영장을 그리기 위해 앞다투어 하나의 색을 선점하려 했다. '살색'이라고 써져 있는 크레파스는 수영장을 그릴 때 너무 많이 필요한 색이여서, 종이 껍질을 돌돌 찢어가며 색칠하다가 항상 손에 다 묻은 채로 몽당해져 있었다. 우리는 수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살을 그 하나의 색으로 칠했다. 연주황색에 흰색을 섞은 매우 밝은 살구색이었다. 말 그대로 '살의 색'이라는 뜻이었지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피부색과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백인의 피부색을 닮은 컬러였기 때문이다. 훗날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살색'이라는 표현은 인종 차별이라는 청원을 수용해 '연주황'으로, '살구색'으로 바껴왔다. 그렇다면 진짜 '살색'은 무엇일까?
살색은 말 그대로 살갗의 색이다. 살갗의 색은 아주 다양하다. 인류의 피부색은 아주 밝고 창백한 색부터 불그스름한 핑크빛을 거쳐 노르스름한 황토색과 올리브색 구릿빛을 포함하고 새까만 색까지 포함한다. 색상으로 따지자면 R(Red)부터 YR(Yellow Red), Y(Yellow)까지, 톤으로는 Pale, Light Greyish, Greyish, Dull, Dark tone까지 매우 폭 넓게 거쳐 있는 것이 '살색'이다. 살색은 피부 안에 갖고 있는 헤모글로빈, 멜라닌, 케로틴의 비율에 따라 피부 바깥으로 비춰지는 색이며, 그 비율은 인종에 따라, 개인에 따라 태어날 때 결정된다. 계절이나 지역, 식습관, 사용하는 화장품이나 생활습관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도 하지만 일정 범위 내에서 개인의 피부톤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개개인에 따라 다르게 타고 나는 피부톤이 무색하게 지역과 시대에 따른 '살색 트렌드'가 있다. 피부색에 대한 선호도와 트렌드는 명화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동시대의 미의 기준을 대표하며, 많은 화가들도 이상적인 피부톤 구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강조하던 르네상스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위해 30번 이상의 얇은 유약층을 바르고 말리고를 반복하며 모나리자의 부드럽고 따듯한 피부톤을 완성했다. 이후에도 로맨틱한 사회 분위기에 어울리는 파스텔 톤의 로코코식 피부톤을 거쳐 빛에 따라 변화하던 피부 색을 포착하던 인상주의의 모네까지.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고 부대끼는 색인 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사과 선망이 반영되어 왔다.
실제 피부색에 대한 선호도는 어땠을까. 계급이 뚜렷했던 20세기 이전의 서양에서는 계층에 따른 라이프 스타일을 피부톤이 대변했다. 야외에서 일하는 하층민과 구별되는 밝은 피부톤이 상류층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20세기 산업화 이후 여가 생활이 중요해지고 나서부터는 태닝된 구릿빛 피부가 건강과 여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코코 샤넬이 태닝된 피부를 선보이면서 브론저와 태닝 제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런 트렌드는 서양 문화권에서 아직까지도 큰 유행으로, 카다시안 가족이나 아리아나 그란데와 같은 유명한 연예인들의 지속적인 태닝으로 이어져, 그들이 백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보다 태닝된 피부가 타고난 피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반면, 동양에서는 무엇보다 깨끗하고 맑으면서 밝은 피부톤이 미의 기준이 되어왔다. 최근에는 자연스러운 톤과 건강한 피부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얘지고 싶은' 여성들의 마음은 크게 변함이 없다. 최근 이런 여자들의 마음을 가득 담은 신종병명이 등장했는데, 이름하야 '쿨톤병'이다. 쿨톤병은 자신의 피부톤이 쿨톤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그래야만 하는 집착 증세를 나타낸다. 기껏해야 쿨톤 색조의 화장품을 사는 정도일텐데, '병'이라고 까지 부르는 이유는 뭘까?
올리브영에서 신제품 시장조사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무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들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꼬마 손님들은 서로 피부톤을 분석해주면서 틴트를 골라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들 "나 쿨톤이지?"라며 서로에게 확신을 요했다. 힐끗 봤을 땐 피부가 유난히 하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쿨톤이라고 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황인종의 피부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쿨톤 피부가 일종의 지위라도 되는 양, 아이들간의 미묘한 권력 구조(?)에 따라 쿨톤인 자와 아닌 자가 나뉘었다. 그리고 업무를 하며 흘끗대던 30대 이모는 가장 말수가 적고 소외되어 보이는 친구는 웜톤으로 치부(?)되어 알 수 없는 은근한 소외감을 받고 있음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심지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피부톤으로 우열을 가리다니. 그것도 잘못된 정보로. 나는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올리브영에서 사람들이 화장품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알바생들이 잘못된 정보를 손님들에게 전달하는 광경을 볼 때, 업계 종사자로서 마구 진실을 이야기 해주고 싶은 오지랖을 여러 번 참아왔지만, 이번에는 아마도 내가 나설 때인 것 같았다.
"이 친구는 여름 쿨톤같은데?" 소녀들은 이 아줌마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이 틴트 내가 만들었거든." 라고 하자, 호들갑을 떨면서 연신 대박, 저 쿨톤이에요? 저는요?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톤과 틴트를 추천해주고 소외되어 보이는 그 친구에게도 '여름쿨톤'으로 진단해주었다. 의외의 결과에 놀란 아이들은 이내 인정하는 눈치였다. 하긴 얘 핑크색 잘어울리기는 해, 저번에 핑크 입었을 때 이뻤어. 라면서. 더불어 나는 꼭 쿨톤이 좋은 것도 아니고 각자의 피부톤에 잘맞는 화장품을 바르는게 가장 좋으며, 너희들 나이 때에는 사실 아무것도 안발라도 예쁘다는 꼰대같은 마무리까지 하고 나의 소명을 다했다 생각되어 이만 퇴장했다. 나마저 '쿨톤'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그 친구를 은근한 소외감에서 구출한 것이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올리브영을 나설 때는 한층 평등해져있는(?) 분위기를 볼 수 있었다.
인간관계와 피부색은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로 그 주변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나의 피부색이다. 피부색에 어울리는 눈썹과 뺨과 입술의 색이 얹어질 때, 비로소 본연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내 주변에 나를 존중해주고 빛나게 해주는 사람을 두려면, 내 피부색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색의 의미가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그 어떤 피부색도 권력을 갖거나 하등하다 여겨져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있는 그대로의 내 피부색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토록 빠르게 흘러가는 트렌드에 휩슬리지 않고 나 스스로를 빛나게 해주는 첫 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