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으로 발령받았어."
남자가 2달의 두바이 출장에서 돌아온 지 3달 만의 일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얼마나?"
남자가 답했다.
"1년.."
두 사람이 서로 독점적인 연애관계를 유지한 지 1년째였다. 이제까지 만난 만큼 앞으로 롱디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마음에는 축하하는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녹아버린 초코 바나나 아이스크림처럼 섞여서 흐물거렸다. 여자는 내 마음이 초코맛이라 해야 할지, 바나나맛이라 해야 할지 몰랐다. 발령 통보를 받고 실제로 홍콩을 가기 전 6개월은 실감 나지 않는 마음과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흘러갔다. 남자의 출국이 있던 1월, 여자는 허전함을 잊기 위해 더욱 바쁘게 지냈다. 마침내 3월에 남자의 생일을 맞아 여자는 홍콩행 비행기를 티겟팅했다.
여자가 홍콩을 가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5년 전, 회사 동기와 어린이날 연휴를 끼고 란콰이펑, 디즈니랜드를 누비며 홍콩의 뜨거운 열기에 가세하여 젊음을 불태웠었다. 당시 사용했던 옥토퍼스 카드*를 다시 홍콩에 가져가서 찍어보니, 그때 20대 한국 여성 두 명이 쏘다녔던 곳들의 내역이 아직도 살아있었다. 이번에도 옥토퍼스 카드를 쓸 일이 많겠지? 여자는 생각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못했던 재즈바 데이트도 해야 하고, 홍콩의 성수동이라는 셩완도 가봐야겠다. 남자친구와 가는 디즈니랜드는 또 색다를 것이다. 옥토퍼스 카드를 두둑이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옥토퍼스 카드(Octopus Card) : 홍콩에서 사용하는 충전식 교통카드.
남자가 홍콩으로 가기 전, 주변 사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역시, 너는 성공 궤도를 달리고 있구나. 축하한다."
"나중에 요직에 가면 나 끌어줘야 된다."
"와! 집 너무 좋은데? 나 놀러 가도 돼?"
회사는 남자에게 구룡반도 내 최고급 아파트를 숙소로 제공했다. 건물 전체는 77층으로, 39층에 있는 2룸 1 거실의 사택을 내주었다. 전 층은 오션뷰로 최고층에 위치한 커뮤니티 센터는 바다가 보이는 수영장, 헬스장, 탁구장, 배드민턴장, 도서관이 있었고, 지하철역과 연결된 지하 쇼핑센터에는 에루샤*를 포함한 명품 브랜드와 주재원 직원 자녀들이 피겨나 아이스하키를 배우는 아이스링크장이 있었다.
*에루샤 :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을 일컫는 최고의 명품 브랜드 3종 세트.
주변의 축하들과 다르게 남자의 마음은 무거웠다. 지금까지 남자가 살아온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집을 제공하는 거라면, 회사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K-장남으로 30년 넘게 쌓아온 책임감과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것은 그의 삶의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그 사명감은 출국 전 두 달간 최고조에 달해 잠까지 설쳤다.
2024년 청룡의 해가 밝았다며 온 나라가 떠들썩한 순간, 한 남자는 1년간 살아갈 타국에 짐을 풀었다. 도착한 당일에 짐을 풀자마자 회사로 출근해서 인수인계를 받고 회식에도 참여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객으로써 바쁜 현지 직원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으며, 최대한 빠르고 능숙하게 랜딩 하여 길지 않은 1년 동안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열심히 해야지.
회사에서 제공한 남자의 집과 회사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집에서 보이는 야경 중 3분의 1은 건물은 회사였다. 그렇게 가까운 이유가 있었다. 홍콩지사에서의 야근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저녁은 컵밥으로 때울 때도 있었다. 이 집 62층에는 바다가 보이는 러닝머신이 있다는데, 그 위에서 뛰어보지도 못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는 타국에 오니 더 잘 느껴졌다. 홍콩은 보통 우리나라보다 덥지 않냐는 친구들의 예상과는 달리, 높은 습도의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집 안에 냉기로 스몄다. 온돌 문화를 발명한 한국의 선조들은 아무래도 천재라는 생각과 해외에는 왜 수출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실내 슬리퍼를 신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사람들이 집에서 신발을 신는 데는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얼음장 같은 집 안의 냉기는 39층의 적막함으로 배가 되는 것 같았다. 남자는 매일 밤 차갑게 잠들며 생각했다. 홍콩의 봄은 언제 오는 걸까.
여자에게 이번 5박 6일 홍콩행은 여행이 아니었다. 첫날부터 지하 마트에 가서 영어와 루꼴라를 모르는 홍콩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루꼴라를 사고, 영어는 알지만 한식을 잘 모르는 아저씨에게 한식 사진을 보여주며 국거리와 갈비찜용 한우를 사 왔다. 치즈 그라인더가 없어서 투박한 손으로 최대한 작게 치즈를 자르던 남자를 생각하며 슈레드 치즈도 샀다. 한 껏 장을 보고 온 다음 날에는 출근하는 남자에게 샌드위치를 싸주고, 남자가 미처 청소하지 못한 부엌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싱글 남성치고는 제법 깔끔하게 살림하는 남자였지만, 홍콩의 비정상적인 습도로 꼬리 한 냄새가 나는 수건과 속옷도 다시 빨고 호텔식으로 개어놨다. 그리고 나서야 가보고 싶었던 집 앞의 미술관을 잠시 둘러본다. 미술관은 하루종일 봐야 할 양이지만, 늦게 가서 반 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이러려고 온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비행기까지 타고 자신을 보러 와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일이 너무 바빠서 휴가를 내거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못다 한 업무를 뒤로 하고, 공항에 작은 꽃다발을 사서 그녀를 마중 나갔다. 아침 6시부터 캐리어를 끌고 출근해 회사에서 바로 12시간을 걸려 나를 보러 와준 작은 참새의 눈이 매우 피곤해 보였다. 레스토랑이 이미 다 닫아버린 시간이라면, 일회용 접시에 담겨오는 배달음식보다는 사랑이 가득한 파스타를 만들어주었다. 남자가 이제까지 홍콩에서 맛본 가장 맛있는 음식, 정어리 토마토 통조림이 들어간 파스타였다. 며칠 동안 연이은 야근으로 여자 못지않게 반쯤 감긴 눈이었지만,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홍콩은 3월 1일이 공휴일이 아니라서 둘이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주말뿐이었다. 게다가, 이번 주말은 남자의 생일도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수, 목, 금을 점심시간에 짬 내서 국수도 먹고, 딤섬도 먹으면서 주말만을 기다렸다. 배를 타고 근교에 가서 하이킹을 하거나, 디즈니랜드에 갈 것이다. 여자는 미니마우스 머리띠도 챙겨 왔다.
직장인에게 주말은 금요일 밤부터다. 남자는 여자가 차려준 미역국과 갈비찜을 먹고 난 금요일 저녁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디즈니랜드에 가지 못했다. 하이킹도 못했다. 그들은 주말 내내 회사가 내어준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남자는 고열에 시달렸다. 코로나 이후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으슬으슬 추웠다. 여자는 집 안에 있는 온갖 이불과 담요를 4겹이나 덮어줬다. 뜨거운 얼굴을 식히기 위해 수건에 찬 물을 적셔 계속 닦아주었다. 남자가 사용해 본 적 없는 전기포트를 꺼내 물도 끓여주고, 라디에이터도 끌어와서 최대로 틀어주었다. 건조함에 취약한 남자의 피부를 위해 수건도 적셔 널어놓았다. 병간호는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너무 자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옆에서 책도 읽어주었다. 남자의 소울푸드인 김치 콩나물 국도 끓여주었다. 이 모든 건 여자가 엄마에게서 받아본 것이었다. 내가 아플 때, 엄마가 어떻게 해줬더니 좋았더라?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내가 아는 최고의 병간호 방법을 총동원했다. 1.5일을 그렇게 보냈다.
마지막 밤이 찾아왔고, 남자는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둘은 마지막 식사로 외식을 하고 바닷가를 거닌다. 아직 바닷바람을 쐴 만큼 나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온 여자를 위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마지막 밤을 앞둔 남자와 여자의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콩의 바닷가도 그다지 예쁘지는 않다. 습도가 100%로 뿌연 안갯속에서 건너편 홍콩 섬의 고층 빌딩들이 뿜어내는 등대 같은 불빛들만 보일 뿐이었다.
여자가 바다 옆 방파제 옆으로 나 있는 난간에 올라갔고, 남자가 손을 잡아주었다. 여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뿌연 안갯속 불빛을 바라보며 난간을 따라 비틀비틀 걸었다. 나 여자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안개가 자욱한 홍콩의 야경을 담았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담았다. 어쩐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이나 뿌연 안개에 뒤덮인 야경에 기대되지 않는 사진이었지만, 남자는 "지금 되게 멋있어."라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홍콩 나름의 빈티지한 공기와 여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담겨 꽤나 멋진 사진이 찍혔다.
20대와 30대에 달라진 것은 여자의 홍콩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젊음이라는 이유로 무모하고 용감했을 수 있었던 20대와는 달리, 30대에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만한 중요한 고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을 할까 말까, 아이를 낳을까 말까, 이직을 할까 말까, 사업을 할까 말까,... 우리는 아직 그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 뾰족한 가치관을 가진 어른이 되지 못했다. 인생은 '이거 아니면 안 돼' 보다는 '이것만큼은 싫어'의 소거법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이토록 끈기 없고 밍숭 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큼 괴롭고 회의적인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인생 중, 하나만 살 수 있는 인생이라면, 다른 선택지를 포기할 만큼의 확신이 있어야 내릴 수 있는 결정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민들을 할수록 우리는 뿌연 안갯속에 휩싸였고, 확실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안갯속에서도 빛나는 저 등대 같은 불빛들에게는 절대 닿을 수 없는 행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여자는 생각했다. 안개 속이여도 내가 믿고 잡을 수 있는 손 하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안갯속을 나름의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 사람. 그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모습도 멋지게 봐주는 사람.
그리고 남자는 생각했다. 저 멀리 등대처럼 빛나는 불빛들보다 소중한 것이 많은 것 같다고. 그게 어쩌면 내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여자일지도 모르겠다고. 텅 비어있던 집안과 내 안에 가득한 온기를 불어넣어준 사람.
"홍콩 재밌었어요?"
여자의 동료들이 묻는다.
"날씨가 흐렸어요. 도시가 예전 같지도 않고.."
이번 홍콩은 5년 전보다 확실히 재미가 없었다. 재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딱히 뒷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설명해도 모를 것이고, 와닿지도 않을 것이다. 홍콩 39층 아파트의 차가운 방바닥과 열이 펄펄 끓는 남자의 이마를 만져보지 않은 사람은 못 느낄 감정들이다.
남자는 여자가 떠난 홍콩의 집에서 긴 머리카락을 청소한다. 여자에게 선물했던 꽃에게도 새로운 물을 갈아준다. 여자가 로그인하고 간 넷플릭스로 '버진리버'를 본다. 꽤나 가족적인 드라마이다.
다음 주는 홍콩의 기온이 20도 이상으로 오른다. 방바닥도 예전처럼 차갑지는 않다.
홍콩의 뿌연 안갯속에서도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