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시절인연에 대한 빛바랜 반추
"얘는 나랑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애야. 지금은 영국으로 간 지 3년 정도 됐어.
얘는 인턴 때 친구인데 아직도 그 회사 잘 다녀, 지금은 승진했지.
맨날 크로스핏 같이 다녔었는데..."
새로 시작한 연인들은 서로를 알아가기 바쁘다. 그 과정 중 하나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 만나보는 경우도 생기지만, 일단은 사진으로라도 친구들의 존재를 알려준다.
우리가 만난 지 3주쯤 됐을 때, 남자친구는 지난주에 만나고 온 친구 사진을 보여줬다.
"이 친구는 내 중학교 때 친구인데, 애가 어찌나 착하고 성실한지. 지금은 서울대 앞에서 카페 한다길래 커피 마시고 왔어. 너무 훌륭하게 잘 살고 있더라고."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 못 하는 나지만, 카톡 사진을 보여주니까 한 번 슬쩍 쳐다본다.
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혹시 이 친구 이름이 뭐야..?"
"김건우.. 왜?"
"이 친구 혹시 어린이집 어디 나왔어..?"
"어린이집..?"
웃음이 터진다. 내 유치원 동창을 남자친구 카톡 목록에서 마주칠 줄이야.
남자친구는 그 즉시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건우야, 너 김혜원이라고 알아?"
"내가 아는 김혜원은... 역삼 어린이집 김혜원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20년 넘게 마주치지 못한 거니, 건우야.
나야 사진을 봐서 그렇다 치지만, 이름만 듣고 역삼 어린이집의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 집에 건우 사진 엄청 많아. 우리 엄마도 알 정도로 친했었어.
얘가 나 좋아했었는데~ 그건 기억 못 하겠지!"
남자친구는 건우랑 몇 번 카톡을 주고받더니 의기양양하게 카톡 화면을 보여준다.
"혜원이 내가 한 때 마음에 품었던 것 같은데~ 미안하다 ㅋㅋㅋ"
"역시, 남자는 자기가 한 번 좋아한 여자는 절대 못 잊어버리지~!"
그래, 네가 날 좀 좋아하긴 했지. 우리 엄마도 항상 날 챙겨주던 애로 기억하니까. 잠시 추억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어 애인 앞에서 재잘대본다.
이야기가 끝난 순간 꺼내지 못할 물음표가 떠오른다. 내 앞의 이 남자도 '절대 못 잊고 있는 여자'가 있는지.
남자의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지난 월요일, 외근을 마치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했다. 이렇게 한적한 평일 오후를 보자니,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웠다. 원래부터 밥 차려줘야 할 남편도 없고, 돌봐야 할 아기도 없지만 괜히 '자유부인'이 된 것 같은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나 자신과 셀프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주말에는 웨이팅 때문에 엄두도 못 냈던 마제소바 맛집에서 혼밥도 하고, 서점에서 읽고 싶었던 책도 들춰보다가 예매한 영화 시간에 맞추어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예전처럼 극장을 잘 찾지 않는 사람들의 문화에 휩슬린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잘 개봉하지 않는 탓이 크다. 겉보기엔 잔잔한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그 속에서 혼자 곱씹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35mm 필름으로 촬영한 아날로그 방식의 색감과 영상미도 마음에 든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지 않고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1분의 예고편만 보고도 느낄 수 있었다. 아, 이건 혼자 봐야 되는 영화라는 것을.
첫사랑에 대한 영화는 아주 많다. 그만큼 강력하고 아련하면서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감정이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아마 이 첫사랑에 대한 감정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모두가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글로벌 영화 시상식 수상 내역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과 작품상 노미네이트부터 77개의 수상을 했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던가.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곳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이 그때는 서툴고, 잘 모르고, 그래서 후회스럽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혹여나 잊지 못하는 사랑과 과거의 내 모습이 있다면 그것들에게 진정한 안녕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 이 글에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은 12살 때, 서로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영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며 둘은 헤어진다. 이때, 나영과 해성은 아쉬운 마음, 안 갔으면 좋겠는 마음, 보고 싶을 마음 등을 숨기고 딱 한마디로 작별한다.
"야, 잘 가라."
대학생이 된 24살의 해성은 페이스북에 그녀를 찾는다. "나영이를 찾습니다."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는 나영은 그 글을 보게 되고, 둘은 영상통화로 재회한다. 오랜만에 보는 그 사람은 내가 기억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고,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아니, 익숙하고 편하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까? 베이글을 사 먹어도 아무리 채워지지 않던 찰나에, 잊고 있던 된장찌개 맛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밤낮을 바꾸는 시차 속에서도 자꾸만 기다리게 되는 영상통화였다.
나영은 묻는다. "너는 언제 뉴욕 안 와?" 해성은 대답한다. "내가 뉴욕을 왜 가?" 두 사람은 각자 이뤄야 할 꿈과 집중해야 할 현실이 있는 청춘이었다. 나영은 해성에게 다시 한번 이별 아닌 이별을 고한다.
"나는 여기서 뭔가를 이루고 싶어. 여기 생활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우리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한 번 더 12년이 지나 소년과 소녀는 36살이 된다. 소년은 다시 소녀를 찾는다. 단, 이번에는 페이스북이 아닌 뉴욕의 공원에서 찾는다. 해성은 나영을 보러 뉴욕에 오고, 둘은 24년 만에 '실제로' 재회하게 된다. 공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를 보고 나영이 말한다.
"와~~~ 너다."
24년 전에 내가 서울에 두고 온 너. 12년 전에 날 보러 오지 않은 너. 못 만난 시간 동안 항상 내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너. 나를 노벨문학상과 퓰리처 상을 받고 싶어 하던 소녀로 기억하는 너.
둘은 공원, 놀이동산, 유람선 등을 배회한다. 그들의 뒤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시선은 서로만을 향해있다. 짧은 재회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각자의 거처인 호텔과 집으로 돌아간다. 나영의 집에는 '아서'라는 미국인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 해성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서는 본능적으로 해성이 나영을 아직 좋아하고 있으며, 나영 역시 그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음을 안다. 가끔씩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잠꼬대를 하는 그녀의 마음속 방 한 칸에 한국말과 함께 남아 있던 해성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열 수 없는 그 방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방의 열쇠는 해성을 만난 나영만이 열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성이 떠나기 전 날, 아서까지 세 사람은 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해성의 한국말과 아서의 영어를 나영이 통역해 주며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지만, 대화는 점차 해성과 나영의 한국말로 이어진다. 해성이 비행기를 타기 3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 마침내 둘은 마음에 있던 질문을 쏟아낸다.
"너 왜 그때 뉴욕 안 왔어?", "너 왜 남자친구 사귀었어?"...
질문에 대한 답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12년 전에 물어봤었어야 할 질문을 뒤늦게 내뱉을 뿐이다.
해성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떠나야만 했고, 그게 너고, 난 그래서 너를 좋아했던 거야."
나영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좋아했던 그 소녀는 여기에는 없어. 이번 생에는 너와 나는 인연이 아닌 거야. "
너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12년 전, 24년 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크다.
해성이 공항으로 떠나는 택시를 타기 전 묻는다.
"우리가 다음 생에 만나면, 그때는 어떨까?"
"모르겠어."
해성을 보낸 후, 집으로 걸어가는 나영에게 시원한 바람이 분다.
해성이 떠난 쪽으로 부는 바람을 거슬러가며, 나영은 울음을 터트린다.
24년 전, 해성과 헤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12살 소녀가 흘렸어야 할 눈물을 대신 흘린 것뿐이다.
24년 전, 서울에서 뉴욕으로 이민을 가야만 했던 소년과 소녀를 흘려보낸 것뿐이다.
우는 그녀를 꼭 안아주는 아서에게 기대어,
반 층 위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많은 말을 하지도, 많은 것을 보여주지도, 많은 것을 전달하지도 않는다. 장기하를 비롯한 카메오급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세 사람이 거의 다이고, 이들의 대사 사이에는 적막이 흐르곤 한다. 주된 배경이 뉴욕이지만, 뉴욕 스러운 장면보다는 두 사람의 눈빛을 보여주는 장면이 훨씬 많이 나오며, 화면 구성도 이 둘을 가장자리에 위치시키며 벽이나 하늘, 바다와 같은 여백을 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영화의 시공간적 여백은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여백을 허용한다. 나에게도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는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안녕을 고할 수 있을지, 흘러가며 지금의 나를 만든 것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되는 이 세상에서, 가끔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해성과 나영의 만남과 이별이 그렇고, 아서가 나영과 해성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서로 좋아하지만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 네가 아닌 이 사람을 선택한 이유, 네가 좋아했던 그 사람과의 만남을 바라만 보는 이유... 사실은 비단 첫사랑뿐만이 아닌, 모든 관계와 감정들이 그러하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 모든 것을 불교적 윤회관인 '인연'에 기대어 흘려보내라 한다. 'Past Lives, 지나간 삶'.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간 것은 흘려보낼 줄 아는 것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좀 더 예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과 인생 속에 놓아버린 것들은 8000겁의 시간을 지나 다음 생에 나에게로 다시 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인연'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