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노팅 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 포르노라면, 여자들의 경우에는 로맨스일 것이다. 로맨스 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팅 힐>은 '남자판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불린다. 이는 <노팅 힐>이 남자들의 판타지에 대해 다루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노팅 힐>은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도 여자들의 판타지에 주목하여 성공한 영화이다. <노팅 힐>의 남자 주인공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를 통해 로맨스 장르의 이상적인 남성상에 대해 알아보자.
이 글에서 다루는 '여성이 원하는 남성상'은 책 <욕망의 진화>에서의 그것을 기반으로 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남녀가 특정한 이성을 원하도록 자연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즉 여자는 자손의 생존에 유익한 남자의 특징을 선호하도록 진화했다. 그 특징으로 지위, 재산, 근면함, 큰 신체, 헌신 등이 있으며, 이 모든 특성은 결국 안정성으로 수렴한다. 여자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남자들은 양육 환경에서도,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안정감을 주었던 남자이다. 자, 그럼 여자가 안정감을 주는 남자를 추구하도록 진화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윌리엄이라는 캐릭터를 뜯어보도록 하자.
윌리엄은 기본적인 자질에서 부족함 없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그는 노팅 힐이라는 아름다운 동네에 살고 있다. 그의 직업은 여행 관련 서적을 판매하는 것으로, 작은 서점이지만 사장이고 직원도 있다. 애나의 지위에 기죽지 않고 말도 조리 있고 재미있게 할 줄 안다. 이런 설정 외에도 <노팅 힐>은 윌리엄을 끊임없이 어필한다. 애나와의 첫 만남 씬에서는 책 도둑을 멋있게 잡아 내며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보여주고, 같이 식사하는 씬에서는 애나를 험담하는 남자들에게 가서 한마디 하는 용기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설정을 윌리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창작물 속에는 각양각색의 남자 주인공들이 있고, 그중엔 개성이 넘치고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남자도, 만나는 것만으로도 주인공의 지위와 재산을 껑충 뛰게 만드는 '신데렐라 스토리' 속 남자들도 있다. 반면 윌리엄은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경우 애나에 비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윌리엄은 여전히 최고의 남자 주인공 중 하나인데, 다른 남자들과 차별화되는 그의 진짜 무기는 바로 관계에서의 압도적인 안정감이다.
애나의 다음 대사에서 알 수 있듯, <노팅 힐>의 시나리오는 둘의 관계에서 애나가 잘못을 저지르게 한다. 로맨스에서는 당연히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한 장애물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노팅 힐>은 왜 애나의 개인적 잘못으로 둘을 멀어지게 만들었을까? 잘못을 용서하는 것만큼 남자의 한결같음을 강조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애나가 데려간 호텔방에서 그녀의 애인을 우연히 발견하며, 그녀가 이를 숨긴 채 자신을 만나왔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둘은 잠시 멀어졌다가, 애나는 사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캔들이 터져 '본인이 힘들다는 이유로' 다시 찾아온다. 그러다가 집 앞에 찾아온 기자들에게 함께 있는 사진이 찍히게 되자 윌리엄에게 불같은 폭언을 쏟아내며 떠난다.
이 상황에서 여성 관객들이 주목하는 곳은 애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럼에도 애나를 사랑하는 윌리엄의 굳건함이다. 관계에서 본인의 잘못 이후 여성이 느끼는 감정은 불안함일 것이고, 그 불안함의 출처는 '내 잘못으로 인해 이 남자가 어떻게 바뀔지 모름'일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윌리엄은 애나가 다시 돌아올 때마다 그녀를 받아준다. 후반부에 '더 이상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한 번 거절하지만, 다시금 기자회견장으로 그녀를 찾아간다. 즉 윌리엄은 애나가 어떤 잘못을 하고 돌아와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심지어는 저자세로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이로부터 여성 관객들은 압도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윌리엄은 든든하고, 절대 나를 떠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 줄 남자로 기억될 것이다. <노팅 힐>이 몇 차례에 걸쳐 애나가 살아온 힘든 삶을 부각하는 것도, 언제나 같은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윌리엄과 그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반대로 윌리엄에게 숨겨둔 애인이 있었다면 어떨까? 불같이 화를 내거나 질투했다면? 윌리엄의 캐릭터가 너무나 굳건하게 구축되었기에 그렇게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윌리엄은 작중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윌리엄은 여성 관객의 질타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맨스 장르의 남자 주인공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특징이 안정감이기 때문이다. 여성 관객이 주인공을 헷갈리고 불안해하게 하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기는 어렵다. 반면 둘의 관계를 여러 번 흔드는 애나의 잘못에 인상을 쓴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인데, 여성 주인공에게는 그러한 안정감이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자 주인공의 안정감을 보여주기 위한 톡톡 튀는 성격들도 많다.
즉 여성 관객들이 윌리엄을 '좋은 남자'라고 느끼는 이유는 (여자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이 남자는 절대 자제력을 잃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리라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바보처럼, 심지어는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호구처럼 나만을 바라봐준다. 이보다 좋은 남자는 없을 것이다.
파격적인 매력 없이 안정감을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가 고전이라 불리는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그 든든함이 정말 강력한 무기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윌리엄은 위트가 있고, 휴 그랜트 특유의 잘생긴 얼굴과 축 처진 눈매도 그의 매력에 한몫한다. 하지만 모든 게 그대로더라도 불안하게, 헷갈리게 한다면 그건 윌리엄이 아닐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강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자기 여자를 사랑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윌리엄의 매력으로 '순하다, 푸근하다'라는 말이 왜 쓰이는지를 알 수 있고, 이것이 결국 하나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필자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다른 로맨스 작품들도 남자 주인공의 재산이나 지위, 성격(때로는 순종적인) 등을 이용해 여성 소비자들이 원하는 안정감이라는 목표를 성취할 것이다. 적어도 여성을 타깃으로 히트한 작품이라면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번 글은 한 가지 토픽에만 초점을 맞추었기에 캐릭터와 플롯, 코미디 등 본작의 여러 훌륭한 요소들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생략한 점,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또한 이 글만 읽으면 애나가 마치 폭군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필자는 성격 좋은 애나가 굳이 굳이 잘못을 저지르게 만드는 시나리오가 약간 억지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습니다 ^^.. <노팅 힐>은 고전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멋진 사랑 영화였습니다. 오늘도 귀한 시간 내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