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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악마의 음식을 만들었다

저게 뭐지?

by 그리여

"엄마 이거 봐!" 하고 큰 딸이 사진을 하나 보여준다.

이게 뭐니?


동생들이 다 같이 들여다보더니 경악을 한다. 내편과 사위는 옆에서 키득키득 웃는다.


악! 엄마 언니가 악마의 음식을 만들었어. 형부가 불쌍해

밥은 메마른 상태로 전자레인지 안에 너무 오래 있던 거고...

해동을 하려다 그런 거니

응 해동을 안 누르고 그냥 시작을 눌러버렸어

저런


이건 또 왜 이렇게 태우셨을까

기름을 덜 둘러서 그랬는지 용가리 한쪽면이 다 탔어. 분명히 익었는지 보면서 뒤집었는데 잠깐 사이에 태워먹었어. 당분간은 내가 요리를 하지 않게 될 거 같아. 엄마 난 멀티가 안되나 봐 이거를 올려놓고 컴에서 일을 하고 있었거든 조금 있다가 뒤집어야지 했는데 인덕션이 그렇게 센 줄 몰랐어

이걸 구으려면 아주 약한 불에 구워야지 냉동이라서 그래야 속까지 익거든

그걸 몰랐어

괜찮아 이렇게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지 뭐 별일 아냐

맞아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또 뭐 사고 쳤어?

캐시미어를 사망시켰어. 캐시미어는 본디 털이 많이 날리는 것인데, 신혼여행 후 오자마자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린 거야. 물빨래가 된 캐시미어는 쪼글쪼글 해졌고 내 마음도 쪼글쪼글해졌어. 이쁜 거였는데 저렇게 만들어 놓고, 흰옷은 구분 안 하고 빨아서 물들여놓고 그랬더니 오빠가 나더러 빨래하지 말래. 해준다고...

아깝지만 그렇게 또 하나 배웠으면 됐지 뭐


딸은 졸업하고 취직하고 바쁘게 사느라 내가 뭘 가리키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다 하게 될 텐데 미리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돈댁은 딸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사위가 막내라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고, 우리는 아직 어려서 보내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딸도 우리랑 더 살고 싶다고 해서 미루었는데 너무 미루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요즘 세대엔 좀 이른 나이에 결혼을 시켰다.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어쩌나 싶었는데, 시어른들도 당신 딸들을 아무것도 안 가리키고 보냈다고 괜찮다고 하고 다행히 사위가 딸보다 살림을 더 야무지게 잘했다.


둘이 서로 협의해서 잘하는 것을 하기로 하고, 딸이 퇴근이 늦으니까 사위가 먼저 와서 집안일을 하고 딸은 재택 하는 날 하는 거 같았다.

사위는 딸에게 밥을 먹이는 걸 사명으로 아는 듯이 아주 잘 챙겨주었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집에서 딸에게 했듯이 하는 걸 보니 신기하다.

딸은 시어른께 딸처럼 살갑게 굴고 이쁨을 받으니 일찍 보내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뭐 잘해 먹고 있나 늘 신경이 쓰인다. 시댁이 우리 집보다 가까워 시어머님이 자주 반찬을 챙겨주시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도 한 번씩 반찬을 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둘이서 알아서 잘 해결하는 것 같다.


엄마 된장찌개가 이상해

간이 안 맞는 거겠지

응 그래서 간장을 넣었는데 그래도 이상해

된장으로 간해야지. 된장찌개는 간장, 소금 이런 거 안 넣어. 그냥 된장으로 간을 맞추면 돼

웅 엄마 고마워


그래도 뭔가를 만들어 먹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저렇게 하다 보면 늘게 되는 것이지. 요금 애들은 똑똑하고 요리정보도 많은 세상이니 하려고만 하면 금방 잘할 수 있을 것이고,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서 블로그에 나만의 레시피를 올려두었기에 나중에 내가 못 챙겨주게 될 때 보면 되니까 달리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둘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걸 보니 마음이 흐뭇하고, 우리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명하게 잘 사는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뭐 안 태워 먹니

엄마 시댁에서 안 쓰는 에어프라이어 갖고 와서 이제는 안 태우고 요리도 다양해졌어 걱정 안 해도 돼. 실수도 이제는 거의 안 해


소꿉놀이 하는 것 같이 사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 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딸은 살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자다가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딸 #실수 #음식

#엄마와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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