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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싱어게인4」 중간 감상평

by 담담댄스

스포츠 경기를 볼 때마다 해설위원들이 이런 말을 하면 너무 싫다.


보셨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경기 순간순간마다 경우의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그걸 맞췄다고 고새를 못참고 자랑하는 꼴이람. 내가 해설위원들에게 원하는 건 족집게 점쟁이가 아니라 플레이에 대한 감상, 해석, 분석인 것을...... 그것도 뭐 '제가 9번 선수 오늘 일낼 것 같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 식으로 '아무나 걸려라'를 시전하고 얻어걸렸을 때 여지없이 생색내는 건 더욱 견디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 나도 생색을 좀 내보고 싶다. 인간의 본성은 내임을 여러분 모두 잊지 않길 바란다.






이번 「싱어게인 4」는 솔직히 지난 시즌보다 재미가 없다. 소수빈이라는 미친 참가자의 등장. 내가 좋아하는 발라드 넘버들을 꽉찬 편곡과 깊은 보컬로 채워준 소수빈의 무대를 보는 재미로 지난 시즌은 정말 재밌게 봤다.


그런데 올시즌은 특별히 눈에 띄는 참가자가 없다. 그나마 내가 찍은 참가자는 생각보다 대중들의 인기가 없는 것 같고, 2라운드에서도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바로 37호 참가자다. 지난 글에서도 이 참가자는 본인의 실력과 끼에 비해 태도 면에서 전략적인 접근이 아쉬웠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무대를 보고 나는 주말 내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37호 참가자의 매력은 소수빈과 달리,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노래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원곡을 찾아 듣게 만든다는 점이다. 1라운드 경연곡이었던 <홍대 R&B>가 그렇고, 이번엔 심지어 더더욱 팬덤 사이에서도 숨듣명이라는 평을 받았던 NCT DREAM의 <Skateboard>를 선곡했다. 이 선택은 매우 전략적이었으며 적중했다.


전주 들어가기 전에


ㅎ응!!!


에서 끝난 게임이다. 저 추임새를 듣자마자 역대급 무대가 될 것이라 짐작했고, 가히 그러했다. 음역보다는 음색, 정박보다는 엇박에 반응하는 나의 취향을 고스란히 저.격. 음악에 맞춰 보여주는 몸짓의 그루브와 7명이 노나 부르는 숨쉴 틈 없는 곡을 키를 올려 애드립까지 소화할뿐더러, 랩까지. 실로 완벽한 무대였다. 태연의 말처럼 말 그대로 정말 美친 놈의 등장이다.


이어지는 결정적인 장면. 37호 참가자의 1라운드 무대를 보고 유일하게 좋지 않은 평을 내린 임재범 심사위원의 한 마디를 듣고, 나도 모르게


I told ya! 내가 말했잖아!!!


를 연발하며 내적 흥분상태로 치달았다.


제가 37호 참가자에 대해 임재범 심사위원이 분명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그등요~



또 하나, 37호 참가자가 전략적으로 머리를 잘 쓴 점은 거대 팬덤이 있는 뮤지션의 숨은 명곡을 너무나도 찰떡으로 소화했다는 것이다. 결국 시청자들의 투표가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에서,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무대를 통해 거대 팬덤의 표를 몰고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몹시 영리했다고 본다. 물론 37호 참가자가 무대에서 마크의 최애인형을 달고 나왔다는 걸 보면, 성덕으로 보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실제 NCT 마크는 이 무대를 캡처해 본인의 인스스에 올려 샤라웃한 바 있다.)


출처_@onyourm__ark 인스타스토리 캡처






이번 주말의 뜻하지 않은 감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잘하는 참가자를 라이벌전(1:1 셧아웃 시스템)에서 만난 불운의 참가자 27호. 1라운드부터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겉멋을 부리는 느낌을 받았기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대를 보고 나의 오만함은 철퇴를 맞아도 싸다는 생각을 했다.



보컬리스트 태연을 몹시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사계>는 태연 보컬의 정수가 담긴 곡이라 생각한다. 깔끔한 발성과 수많은 경험이 켜켜이 쌓여 깊이를 보여주는 보컬. 거기에 특유의 해석력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한 태연의 <사계>를 선뜻 경연곡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정말 태연의 말대로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나는 무너졌다.


사계절이 와, 그리고 또 떠나


이 정도 실력이면 겉멋좀 부려도 되지


내가 원곡에서 느꼈던 것은 권태, 미련, 공허 이런 감정들이 태연이라는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보컬을 만나 덤덤한 듯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 27호 참가자의 <사계>엔 좀 더 짙은 농도의 감정들을 소리에 담겼다. 고음에서는 공기를 가득 넣어 처연함을 더했으며 저음에서는 소리의 비중을 높여 묵직한 톤으로 심장을 덜컥 가라앉게 만드는 반전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원곡에서 느낄 수 없었던 '리듬감'.


<사계>가 이렇게 리드미컬한 노래였어?


나는 왕년의 인기가수들이 최근에 자신의 히트곡이나 유행가를 부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너무 박자를 밀었다(레이백) 당겼다(싱코페이션) 하기 때문이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노래를 못해도 천 번쯤은 불렀을 테니 얼마나 지겨울까. 그래서 음을 자유자재로 밀고 당겨 재미를 주고자 하지만, 사실 그건 본인만 재밌을 거라 짐작한다.


그런데 27호 참가자는 타고난 재능으로 음을 살짝씩 밀어낸다. 레이백은 자칫하면 무대에 대한 몰입을 해치며, 가수 본인이 타고난 리듬감이 없다면 무대를 망칠 수도 있어 조심히 써야 한다. 그것도 경연장 같이 긴장도 높은 무대에서 레이백을 쓰다니. 27호 참가자는 상대방의 역대급 무대에도 긴장하지 않고, 무아의 상태로 리듬과 혼연일체가 돼 또 다른 공명을 주었다. 무엇보다 열여덟 살의 무대라고는 믿기 어렵다.


크게 걱정은 안 하셔도 될 듯. 오히려 원곡 스밍 더 올라갈 듯.


I gave you the world
너만이 전부라
내 겨울을 주고 또 여름도 주었지
뜨겁고 차갑던 그 계절에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

내가 너를 사랑했을까


이 계절, 자신의 겨울을 기꺼이 내어줬던 수많은 사람들이 꼭 한 번 들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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