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고
스포일러인가 싶지만 스포일러일지도 모르는 내용들이 포함됐습니다. 아직 안 보셨거나 보고 계신 중이라면 스킵하셔도 됩니다.
오피스 드라마는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감동한 「미생」조차 보지 않았다.
굳이 매일 겪는 일인데 뭐하러 집에서 또 보나
싶은 마음. 드라마가 현실 직장을 제대로 담아낸다면 그것대로 트라우마고, 신입사원이 사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식으로 별나라 얘기를 하면 오글거린다. 그거 아니어도 볼 게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네이버 블로그에서 연재됐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정말 재밌게 봤다. 애초에 블로그 연재용이었던 걸 감안하면, 원작자가 전문적인 극작가가 아니라서 좋았던 점이 더 많았다. 불필요한 이야기를 들어내고 현실 직장에서 겪는 문제들, 재테크 이야기,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갈등까지, 50대 대기업 직장인이 실제 겪을 법한 이야기를 사실감 있게 치고 나가 몰입도를 높였다.
동명의 드라마는 원작과... 너무나도 달랐다. 원작에서 몰입감을 높였던, 정말 회사에 몇 명쯤은 있을 법한 김 부장 캐릭터의 개연성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김 부장을 너무 구린, 그러다 나중에는 갑자기 멋있어지는(?), 그래서 별로인 캐릭터로 만들어 버렸다. 원작의 김낙수 부장이 업무역량이 출중한 데 반해 조직관리 면에서 모자랐던 소시오패스형 캐릭터였다면, 드라마에서의 김낙수 부장은 능력도 없고 일명 '낙수효과주'로 대표되는 술자리 스킬과 싸바싸바로 팀장 자리에 오른 쌍팔년도 꼰대 캐릭터가 돼 버린 것이다.
변호사들이 법드를 보거나, 의사들이 의드를 봤을 때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들이 아마 회사생활을 오래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면 이해는 간다.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어느 땐데 담합을 일삼는 것이랄지, 유튜브 인플루언서를 영업조직에서 관리하는 거라든지, 그렇게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릴 것이 아니라 광고를 주는 게 더 말이 되지는 않을지, 아무리 개발 안된 곳이라도 역세권 상가 1층 코너자리를 10억 5천에 분양한다든지, 백수에게 무담보 신용대출 5억 5천이 가당키나 한지 등등. 조금이라도 제대로 고증했다면 이 드라마를 지켜보는 게 그토록 고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 장르를 다시 정의했다. 이른바 현실판 판타지, 줄여서 현실판타지 드라마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편안히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원작이 아닌 철저히 드라마에 국한해서 감상평을 남겨 보자면, 많은 직장인들이 감당해야 할 페르소나 설정과 이에 수반하는 문제들, 결국 진정한 자아찾기로 귀결되는 이야기다. 작가는 상향평준화된 50대 남성에게 어울릴 법한 전형적인 페르소나들을 입혀 김낙수라는 인물을 만든다. 이렇게 전형적인 특성만 추려서 캐릭터를 만들다 보니 오히려 현실과 너무 괴리된 인물이 나와버렸다는 것이 제일 큰 함정.
성대를 졸업해 통신 3사 대기업에 신입으로 들어가 입사 25년을 맞는 김 부장
팀원들에게 존경받고 싶지만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전전긍긍하며 옆팀 후배팀장을 부러워하는 팀장
오직 '임원 승진'이라는 야망 하나로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상사의 일상까지 짊어진 부하
서울 한복판에 번듯한 내 집하나 마련해 두고 꼬박꼬박 모자라지 않게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가장
외동아들을 연서대(아마 연세대)에 보내놓고 자랑하지만, 사실은 서울대에 보내지 못해 서운한 아버지
이토록 수많은 페르소나를 지탱하는 것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형과의 차별대우에 상처받은 인간 김낙수의 인정욕구뿐이다. 삶의 목표가 오직 인정욕구뿐이라면, 순간의 자존심을 버려 얻어낸 것들에 대한 높은 자존심만 남게 된다. 이를테면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지위, 좋은 차, 좋은 집 같은 것. 이렇게 쟁취한 자존심은 남이 가진 것보다 늘 나은 것, 최소한 같은 것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지지 못한 남들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며 무시하는 쪽으로 흘러 비대해진 자아만을 남기고 만다.
자존심이라는 값비싼 메이크업에 길들여지면 점점 민낯을 보여주기 싫어진다. 자존심을 지키느라 깊어지는 다크서클과 팔자주름은 콤플렉스로 인식되고, 이를 보여주기 싫어 두터운 파운데이션 위에 또 퍼프를 쳐대는 삶. 퇴근해도 집에서조차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고 이른바 '가장의 권위'를 앞세워 가족 구성원들을 향한 자신의 무례를 정당화하는 삶. 김 부장은 당신들의 밥그릇을 책임진다는 이유로, 가족들의 밥상 위에 어떤 음식들이 있었는지 묻지 않고, 밥값을 대신해 나를 무작정 지지하고 이해해 주기만을 바란다.
작가는 드라마 후반부에 나름의 반전(?)으로 보여줄 김낙수의 실로 '드라마틱한' 성장을 위해 원작 팬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너무나도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특별해 보일 지경의 캐릭터로 주인공을 바꿔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뻔하고 오글거리는 전반부를 잘 넘기고 나면 차분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특히 이 현실판타지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 있다면,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김낙수만 다른 사람을 위한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자리보전을 위해 20년 넘게 동고동락한 부하직원을 단칼에 지방 공장으로 좌천시키는 백 상무, 승진을 위해 자신을 이끌어 준 상무를 단번에 배신하고 전무 라인으로 갈아탄 도 부장, 회사에서 받는 차별대우를 견디지 못해, 퇴사한 김 부장을 찾아가 무지성으로 '백 상무님이랑 그 (부당한) 일 한 번만 해주면 안 되겠냐' 부탁했던 정 대리, 정리해고 이야기가 나오자 '많이 해먹은 나이 많은 사람이 나가야 한다' vs. '기회가 많은 젊은 사람들이 나가야 한다'며 웃통 까고 싸운 공장 직원들. 모두 자신들의 먹고사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김 부장만이 공장 직원들의 해고 명단을 추린 엑셀파일 하나를 보내지 못해 그 고생길에 접어든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정리해고 명단을 추리라는 얘기도, 그걸 심부름했다고 본사로 복귀시키는 얘기도 허무맹랑해 보이지만(이건 내 경험이 일천해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그렇게 속물 of 속물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밥그릇을 걸고, 타인을 위해,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은 순간이야말로 드라마 속 가장 판타지적인 모먼트였다.
1화에 등장한 김낙수 부장의 근무지는 탑뷰가 돋보이는 꼭대기층이었지만, 마지막 12화에 이르러서는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같은 빌딩 지하주차장으로 낮아진다. 그러나 꼭대기층에서 늘 굽신거리느라 구부정했던 김 부장의 허리는, 그 빌딩의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떳떳하게 곧추선다. 그렇게 그는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오던 김 부장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김 사장이 된다.
더운밥만을 지향했던 알량한 자존심은 모두 내려두고, 밥그릇이라는 알짜 자존심을 챙기기로 결심한 찬밥신세 김 부장을 향해 가족 구성원들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진심 어린 지지를 보내준다. 또, 김 부장을 하수로만 여기고 김 부장을 밀어냈던 후배 도 부장 역시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한 김 부장을 보며 '내가 졌다' 패배를 인정한다. 인정욕구를 내려놓자 남들의 인정을 받는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는 드라마의 완성도를 떠나 많은 깨우침을 선사한다.
문득 나를 지방 공장에서 정리해고 대상자를 추려내야 하는 김 부장에 빙의시켜 본다. 좌고우면할 것도 없다. 나의 선택은 100%! 명단을 추려 엑셀파일을 본사 인사팀에 보내는 것이다. 밥그릇을 빼앗기면 더운밥이든 찬밥이든 담을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찬밥을 무지하게 좋아한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남들의 밥그릇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보낼 만큼 이 회사가 나를 중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P.S. 이 드라마 최고의 판타지를 깜빡했네. 명세빈 같은 와이프는 현실세계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절대 존재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