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오래된 서적〉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오랜만에 기형도 시집을 펼쳐본다. 한때 열렬히 애독했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이다. 낡은 시집을 들춰보자니 우연히 옛 연인을 만난 듯 마음 한쪽이 뻐근하고 아리다. 책 갈피갈피에 밑줄과 메모로 남아 있는 내 젊은날. 염세에 찌든 시인의 시에 밑줄까지 그으며 그 시절의 난 무엇에 그리 열중했나. 젊은 시절의 내가 낯설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중략)
나는 여러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하략)
― 기형도, 〈오래된 서적〉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과 염세의 터널을 지나 어른이 된다. 젊음이 매번 희망찬 것은 아니었다. 그 명징한 젊음이 버거워 쩔쩔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청맹과니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터널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암담했던 시절. 차라리 빨리 시간이 흘러 나이들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다. 지내 놓고 나니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은 별로 없었다. 누구나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 할 세파였을 뿐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듯하다.
그 시절 날 위로했던 건 나보다 더 깊은 절망 속에 사는 것 같던 기형도의 시였다. 몹시도 자전적인 시들. 그 속에 담긴 남의 불행을 보며 내 처지를 위로받는 게 얼마나 치졸한 짓인 줄 알면서도, 시인의 시를 볼 때마다 그를 안쓰러워하며, 그보다 슬픔의 부피가 상대적으로 적은 듯한 내 삶에 안도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스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의 첫 행이다. 1969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어머니는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졌다. 아픈 아버지와 부재한 어머니 사이에서 화자는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 있는 듯 외로웠을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중략)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시 속 화자의 유년은 쓸쓸하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열무 팔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기다림과 배고픔에 지친 아이는 졸다 깨다 했으리라. 시간이 흘러 그때를 되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엎드려 훌쩍이는 어린 자신의 모습.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선생님이 집에 올까 두렵고, 상장으로 종이배를 접어 버려도 누구 하나 알 리 없는, 무심한 가족. '유년의 윗목'이라는 말이 눈시울 뜨겁게, 가슴 아프게 꽂힌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내 경력은 출생뿐"이라니, 사람이 얼마나 절망해야 이런 말을 할까. 가진 게, 겪은 게 태어난 것뿐. 그것마저 버릴 수 없기에 죽음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말. 먹먹하다. 홀로 너무 외로웠던 탓일까.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므로 사랑할 줄 모르는, 가련한 아이. 끝내 자신마저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가엾은 영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략)
― 기형도, 〈오래된 서적〉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오래된 서적, 그런 날 누가 펼쳐볼 것인가. 자기확신이 없는 불안한 청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더이상의 희망은 없다. 그러니 나를 제외한 다른 것을 동경하고 질투하는 것,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다. 질투는 그나마 나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
(상략)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1989)
"잘 있거나,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 집〉)를 노래했던 시인 기형도. 그는 1989년 3월, 자신의 첫 시집 출간을 앞둔 어느날 새벽, 서울 시내의 한 극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내 경력은 오직 출생뿐이어서 죽음은 생각조차 못했다던 시인은, 시만 남겨두고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만 28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