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비가 사위를 물들이는 오후
내 어깨 위에 누군가 앉아 있다
그는 흥얼거리며 발장난을 친다
작은 발이 통통 부었다
난 그에게 책을 읽어줄 생각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늙은 작가의 소설을,
한 땀 한 땀 수놓듯이
노래하듯이
읽어줄 생각이었다
책은 보이지 않고
흰 나비떼만 날아든다
잠시 난 내가 무얼 하려는지 잊고
그들의 군무를 넋놓고 바라보았다
아득하니 어지러운 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이 춤을 멈춘 곳에
찾던 책이 놓여 있다
책은 궂은 비에 흠뻑 젖었다
이를 어쩐담
어깨 위에 앉은 누군가는
그새 잠이 든 건지
쌔애쌕
낮은 숨소리를 낸다
난 젖은 책장을 하나씩 뜯어 말리며
그가 고요한 오수에서 깨어나길 기다린다
반짝
그새 비가 그치고
가는 빛줄기가 잠시 내 어깨를 스친다
그 빛 때문인가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누군가
샛된 숨소리를 멈추더니
내 어깨를 딛고 일어선다
나풀...
미처 그의 발을 잡을 새도 없이
나풀...
그는 하늘로 날아올라
흰 나비떼에 섞인다
안 돼요
이제 곧 책이 마를 텐데
이 이야기를 듣고 가셔야죠
어디선가 나뭇잎 타는 냄새
내 손에 들려 있던
책 속의 글자들이 모두 타버리고
흰 종이만 남았다
이제 네 얘기를 써보렴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
호르륵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