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의 영화 <공포분자>의 시작은 굉장히 혼란스럽다. (내가 남자 배우들 얼굴 알아보는 데만 시간이 좀 걸렸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처음부터 인물끼리 긴밀하게 얽히는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보이던 각각의 서사들이 점점 맞물리는 이야기라는 점이 한몫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의 서사가 겹치면서 상황은 그야말로 꼬여간다.
“소설은 소설일 뿐”
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을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를 말한다. 이러한 소설의 특성상 허구와 진실 사이 줄타기가 발생한다.
주울분은 자신의 일상과 경험을 녹여낸 소설 <결혼실록>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한다. 주울분의 소설은 권태로운 부부를 주인공으로 한다. 아내가 장난 전화를 받으며 고통에 빠지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후 자살하는 이야기다. 남편을 떠나 불륜 상대와 살기로 한 선택에 대한 변명 같은 이 소설은 실제 자신의 경험을 조립해 꾸며낸 허구인 것이다.
주울분은 동시에 “소설은 소설, 허구일 뿐”이라고 가장 많이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주울분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를 보며 이 기묘한 진실과 허구의 경계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주울분의 입을 빌려 “영화는 영화,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심각한데!)
숙안은 습관적으로 장난 전화를 거는 인물이다. 사람이 없는 주소로 배달 음식을 시키기도 하고, 소방차를 부르기도 하고, 이립중의 내연녀인 것처럼 주울분을 속이기도 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 속에 진실은 없고 오로지 허구만 있다.
사진사인 소강은 우연히 마주친 숙안에게 매료돼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현상해서 이어 붙이고 또 벽에 걸어 놓는 인물이다. 여자 친구랑 사이가 틀어지는데도 사진과 자신의 작품에 너무나도 몰입해 있다. 숙안을 만난 뒤 다시 여자 친구에게 돌아가는 인물로, 장난 전화 사건의 진실을 이립중에게 전하려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립중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다. 어쩌면 모든 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 의도적으로 배제돼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울분은 이립중에게 그동안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권태로웠는지 고백하며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주울분은 “이래도 모르겠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부부이면서도 서로의 서사에서 가장 타자 같은 인물들이다.
이립중은 여전히 아내가 왜 자신을 떠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면서도 보내 준다. 그리고 주울분이 떠난 동안, 주울분의 소설이 당선되며 주울분은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립중은 주울분에게 재결합 의사를 묻지만 주울분은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라고 말한다. 이립중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회사에서 승진하고 아내의 소설이 당선되면 모든 게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제야 이립중은 이전까지는 읽은 적 없던 주울분의 소설을 읽는다.
이립중이 아내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으로부터 가장 배제되어 있는 이유는 사실 본인에게 있다. 이립중은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쓰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주울분은 내연남 유빈에게 “(남편은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주울분이 “내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두려움을 내보일 수 있는 대상도 남편이 아닌 내연남이다.
주울분의 소설을 읽은 이립중은 주울분을 찾아가지만 주울분은 여전히 "소설은 소설"이라고 말할 뿐이다. 자신이 이립중을 떠난 것은 장난 전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서부터가 소설인가?
후반부의 시퀀스는 혼란스럽다. 이립중은 잠든 친구의 총을 가져가 자신을 무시하는 상사를 쏴 죽이고, 아내의 내연남을 죽이고, 장난 전화를 건 숙안을 찾아 위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립중을 찾아온 경찰이 발로 문을 뻥! 찰 때 그 소리는 총성과 겹쳐진다. 잠에서 깬 친구가 욕실 문을 열면 그곳에는 권총으로 자살한 이립중이 있다. 화면이 전환되고, 주울분이 잠에서 깨어나 헛구역질을 하는 장면에서 엔딩.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이는 관객에게 혼란을 주는 엔딩이면서,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주울분의 대사를 반영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나가면서
<공포분자>의 영제는 ‘The Terrorizers’이다. ‘공포에 떨게 하는 것’, ‘공포의 대상’쯤으로 해석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서로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이면서 서로의 존재를 공포스러워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제목 같다.
좋았던 장면
1. Smoke Get In Your Eyes
노래가 흘러나오고 화면은 너무 예쁘고. 화면 참 예쁘다 생각했는데 어디서 멈춰 놓아도 아름답겠구나 싶었다. 이 장면이 지나갈 때 이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2. 주울분의 고백
무건인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이 표정을 관객인 나만 보고 이립중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것도 완벽하게 좋은 장면.
*‘Smoke in your eyes’만큼 좋았던 엔딩 크레디트 삽입곡은 채금의 ‘請假裝你會捨不得我(Please Pretend You Would Not Let Me Go)’인데, 나는 내일 밤 외롭고 외로울 것이야~라는 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