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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창비

by 자몽커피

독서모임으로 꼭 하고 싶었던 책이다. '그분이 오시면 이런 책을 쓸 수 있나'하고 읽었으나 치밀한 취재가 바탕이 되었다는 말에 역시 글을 쓰는데 꼼수는 없다는 것. 독자로서 이번 책을 만났다는 것에 큰 감사를 보낸다.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 모인 모두가 젊은 작가가 이런 소재를 썼다는 점에 칭찬의 목소리가 많았다.

<혼모노>는 새로운 세대의 리얼리즘을 열어가고 있다고 평가받는 성해나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단편집인 경우에는 가장 좋은 작품 1~2개, 평이한 작품 1~2개, 그저 그런 작품 1~2개로 나눠지기 마련인데 나는 일곱 작품 모두가 좋았다.


표지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가짜인 초록 사과와 진짜인 빨강사과를 반쪽씩 연결해 놓은 줄 알았다. 자세히 보기 전까지는.

그런데 둘 다 가짜다. 사과 밑에 있는 한글, 일본어, 한자, 영어는 모두 진짜를 말하는 단어들.

혼모노, 본물, ほんもの, GENUIN.

결국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가짜도 진짜가, 진짜도 가짜가 되는 세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사랑, 우정, 조국, 무속, 팬문화, 사회생활, 건축 등으로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킨다.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소설 속 주인공처럼 한 순간 팬심이 식어버린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도덕성의 유무와 상관없이 추종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오간 작품이다. 맹목적인 팬심을 신앙으로 본다면 논리라는 칼이 들어갈 자리가 만무하다.

치앙마이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를 팬들로 보는 시각과 감독으로 본 시각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둘 다 가능하다고 느꼈다. 이빨이 빠지고 손톱이 없는 상태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길티클럽 팬으로 볼 수도,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김독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티클럽 같은 뜨거운 팬심이 1도 없는 나로서는 작가가 분명하게 내고 있는 목소리에 크게 공감이 갔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p.65


#스무드

가장 좋았던 작품 중 하나. 절대 매끈한 세계로 추앙할 수 없는 태극기 부대를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읽게 한 작품이다. 미국인임을 강조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김치나 한식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재미 한인 3세 듀이가 미술가 제프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난생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성조기와 '타이극기'를 든 이들의 행렬 속에 들어가면서 부모에게도 받지 못한 환대를 받게 되고 광장에서 만난 노인들의 따스한 온정과 교류에 아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며 아버지에게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는 제프의 '스무드'라는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의 이중성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아파트 내부 갤러리인 이 장소는 사적인 동시에 권위적이다. 그전에는 데이비드 호크니나 세실리 브라운,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이 걸리기도 한 곳이니까. 광화문 광장과 아파트 갤러리를 하나로 엮은 작가의 통찰력에 다시 한번 감탄한 작품. 나에게 사적이면서 권위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아버지는 내게 한국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갈등이 없는 거겠죠. 서로를 전혀 모르니까요.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p.104


#혼모노

신 애기에게 신 할멈과 단골을 빼앗긴 박수무당 문수는 신빨이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작두에 오르고 칼날을 얼굴에 들이대며 굿을 한다. 30년이나 일했으면 베테랑소리를 들을 만하지 않은가? 문수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존버정신은 남아 있어서 이제 신 없이도 진짜가 되겠다며 치르는 마지막 의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피 칠갑을 한 문수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떠올랐다. 인간은 파멸하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때로 그분이 오셨구나 하는 순간들이 있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고 내가 굳이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글이 춤을 추는 지경말이다.

바나나우유가 좋은 줄은 모두 알지만 때로는 바나나맛 우유가 먹고 싶어지기도 하다. 이제는 바나나맛 우유가 하나의 정체성이 된 세상. 매출이 얼마더라~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p154



#구의 집

남영동 대공분실과 경동교회 하면 떠오르는 사람. 바로 건축가 김수근이다. 김수근이 지었다는 불광동 성당을 다녔다는 한 회원은 이 책을 읽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한 인간의 재능이 악과 선 모두 완벽하게 쓰일 때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해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이렇게 위험할 수 있다니. 뱡향성이 없는 재능과 성실은 평범한 악인을 양성하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여재화와 구보승은 결국 한 인간이었다는 것.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보여주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악한 면이 들어있다는 것을 작품은 보여준다. 자신의 이름대신 제자의 이름을 올리는 여재화가 나는 더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p.192


아니야. 여긴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야. 난⸳⸳⸳⸳⸳⸳ 그런 걸 가르친 적 없어. p.193



#우호적 감정

대기업에서 스카우트된 진은 대기업에 다니다가 온 탓인지 스타트업 조직 문화과 낯설기만 하다. 알렉스는 아버지뻘 되는 진이 안쓰러워 닉네임도 지어주고 나름 마음을 써주는 요즘 시대 보기 드문 캐릭터. 자기 몫도 버거워하면서 남까지 챙긴다는 핀잔을 듣지만 호의적인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 초기 멤버인 수잔은 업무상 빈틈을 부드럽게 넘기지 못하는 깐깐함과 매사 회의적인 면모를 보여 불편해하는 직원들이 많다.

테헤란로에서 실리콘 벨리 병에 걸린 사장 맥스는 알렉스, 수잔, 진에게 농촌 재생 사업 프로젝트를 맡긴다.

세대갈등의 문제를 서열을 지양하는 회사에서 보여주는 아이러니. 돈에 따라 이해관계가 갈리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잘 드러나 있다.

소통과 화합이 전혀 되지 않는 사내 소통의 날이라니. 이런 거 만들고 자신은 진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맥스가 그저 안쓰러울 뿐.


정이 흘러넘치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 안에서, 나는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p.240


#잉태기

'나'는 딸 서진의 임신과 출산부터 입학, 유학, 결혼, 출산 문제까지 시부와 견해가 달라 심한 갈등을 겪는다. 서진의 원정 출산 출국 날엔 공항에서 서로 삿대질하며 괴성을 지르기까지. 나와 시부 사이에서 양수가 터진 서진이 무슨 말인가 하지만 듣지 못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누군가를 응원하다는 뜻의 지지와 더럽고 만지면 안 되는 뜻을 지닌 지지의 양면성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시부나 며느리나 결국 똑같다. 사랑으로 포장한 폭력의 덩어리들. 그런 폭력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서진도 문제려나.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 p.297



#메탈

1994년 생인 우림, 조현, 시우는 고교 밴드부에서 만나 코발트라는 팀을 결성한다. (기타와 보컬에 우림, 베이스에 조현, 드럼에 시우), 그들의 첫 무대곡은 람슈타인의 [Ich Will]. 음. 심드렁했다는 관객들의 반응처럼 나 또한 그랬다. 메탈의 부활을 꿈꾸지만 쇠락의 속도를 어쩌지 못하는 현실이 서해 어촌에서 숙박업을 하는 우림, 컨테이너 임대업을 하는 시우네의 모습과 겹쳐졌다.

조현이 베이스 대신 문제집을 풀면서 서서히 밴드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조현이 서울권 대학에 들어가자 동네에 남은 시우와 우림은 부모님의 일을 돕는다. 끝까지 음악에 손을 놓지 못한 우림이 홍대 메탈 그룹의 초라한 공연을 보면서 민망해하는 장면에선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꿈, 청춘, 우정에 대한 이야기 메탈. 시간이 부족해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게 끝내 아쉬운 작품이다.


돈과 생업, 얼마 전 헐값에 처분한 오토바이에 대해. 한때는 근사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고 투박해진 타투에 대해.

살에 파묻혀서 이젠 보이지도 않는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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