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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문하동네

by 자몽커피

처음 시작은 흠잡을 데 없이 화창한 7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7월의 첫번째 일요일. 조그만 구름 덩어리 두셋이 신중하게 찍힌 바람직한 문장부호처럼 저 하늘 멀리 하얗게 떠 있었다. 햇빛은 무엇에도 가로막히지 않고 스스럼없이 온 세계를 비췄다. 꾸깃꾸깃 뭉쳐서 잔디 위에 내버린 초콜릿 포장지조차 그 7월의 왕국에서는 호수 밑바닥 전설의 수정처럼 자랑스럽게 빛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상자 안에 또다른 상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빛 속에 또다른 빛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빛 속의 빛은 무수히 많은 고운 꽃가루처럼 보였다.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꽃가루다 그것들은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아다니다 이윽고 천천히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p.51





신작이 나올 때마다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읽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시작으로 산문을 제외하고 소설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이번 책은 작가의 첫 단편소설집으로 몇몇 단편은 대폭 손을 보고 출간한 것이라고 한다. 2014년에 나온 책인데 나는 작년에서야 이 책을 읽었었다.

소설같은 창작글을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글이 막힐 때마다 꺼내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특히나 요즘 같은 날씨에 표지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책이랄까~

제목과 첫 장면이 써지면 스토리 하나가 만들어진다니, 그 내공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이런 방법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직은 아니다.


*중국행 슬로보트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뉴욕 탄광의 비극

*캥거루 통신

*오후의 마지막 잔디

*땅속 그녀의 작은 개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가장 최근에 읽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관통하는 부분이 많아서 '작가의 세계관이 크게 변하지 않았네'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고 이른 나이에 찾아오는 사랑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를 테지만, 여전히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소년들에게서 하루키선생의 소년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악인 따위 나오지 않고 스펙터클한 스토리는 없지만 경계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외로운 인물들이 더욱 정이 가는 이유이다.

도서관, 일각수 동상, 이유 없이 떠나간 연인같이 스쳐 지나가는 단어에서도 작가의 상상 속에 만들어낸 '도시'가 언뜻언뜻 떠올랐다. 나만 이런가?


그렇다. 만일 그 세계에 시 한 토막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면 나는 그에 대한 시를 써도 좋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아주머니들 세계의 영예로운 첫 계관시인이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다, 고 나는 생각한다. p.83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전작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연결되듯이 작가가 그리고 있는 세계와 인물들이 내게는 언제나 친숙하다.

하루키 작가의 책에 반드시 나오는 장르가 바로 음악과 음식인데 나는 재즈나 팝음악엔 까막눈이나 다름이 없어서 그때그때마다 검색을 해서 듣는 편이다.

지금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옐로우 서브마린이나 <중국행 슬로보트>에 나오는 소니 롤린스의 <온 어 슬로보트 투 차이나>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책 좋아하고 주류보다는 슬쩍 떨어진 곳에서 성실하게 잔디를 깎고 있는 이름 없는 인물들을 되새김질하며 노작가가 계속 책을 써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본다.



그녀는 헤어지고 싶다고 할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는 네가 마음에 들고 헤어질 이유가 없다, 고 하면 될까? 아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소리다. 마음에 든다,는 말에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런 말로 나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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