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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소리 Aug 11. 2024

119구조대원의 감사한 전화 한통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장남에 장손이다. 내가 어릴 때 유머로 최악의 신랑감으로 장손, 장남, B형 남자, 곱슬머리에 왼손잡이를 가진 사람이 뽑혔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우리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어려움이었다. 하루는 대학생인 나와 고등학생인 동생이 학교에 가고 엄마는 일을 하러 가야 되는 아침에 일이었다. 엄마 지갑에는 5000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고 5000원으로 셋이서 나눠서 버스를 타기에는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엄마가 바빠서 돈을 찾아 놓는 다는 걸 깜빡한 것 같았다.

나는 친구가 데리러 온 걸 깜빡했다고 아침에 먼저 나왔다. 아마 내 동생도 그대로 나와 학교에 걸어갔을 것 같았다.

학교에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같다. 버스를 타면 빨리 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 지금처럼 도로에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걷는 게 제일 편안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대학교를 잘 마치고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내가 소대장으로(중위) 생활하던 시절 당직근무를 서고 한참 자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데 119 구조대원이었다.

잠결에 들어 정신이 없었지만 전화기에서 넘어오는 목소리만 듣고 상황이 좋지 않을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화상을 입으셔서 큰 병원으로 옮기셔야 되는데 보호자 동의가 확인이 필요해서 병원으로 오셔야 됩니다. 아버지 전화기에 아들이 저장되어 있어서 먼저 전화드려요. 가능하면 빨리 와주시면 좋겠네요. 그럼 저희는 철수해 보겠습니다."

내가 있는 곳은 경남 진해였고, 아버지가 계신 병원 응급실은 포항에 있었다. 씻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출발을 해서 응급실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미라처럼 붕대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고 119 구조대원이 전달해 달라고 했던 소지품을 간호사에게 받았는데 내가 사드린 MP3가 불에 타서 전원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었으며 전화기를 같이 받을 수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버지를 보고 병원을 옮기자고 했을 때

"뭐 하러 왔어 바쁜데,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들." 아버지 첫마디였다.

너무 속상하고 무섭고 걱정이 심하게 됐었다. 그리고 전원이 켜지고 꺼지는 MP3를 보며 마음이 더 복잡했다.

"제가 빨리 큰 병원 알아볼게요. 아프실 텐데 걱정하지 마시고 잠시만 쉬고 계세요."

그때 당시 같이 근무하던 중대장님의 동생분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의사로 계셨다. 중대장님께 보고를 하고 나온 터라 어디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을지 상의를 하고 병원 앰뷸런스를 통해 포항에서 서울로 바로 이동을 했다.

나는 부대로 돌아와 필요한 소지품을 챙기고 청원휴가를 써서 서울로 이동했다. 엄마와 동생에게 이동한 병원을 알리고 나는 서울에 한강성심병원으로 갔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원생활은 시작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얼마나 계셔야 되는지도 모르고 우리 가족들은 쉬는 날을 맞춰가면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나도 청원휴가를 계속 보낼 수 없어서 부대에 보고를 하고 최대한 휴가를 활용했으며 금요일에는 진해에 막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중환자실 면회가 가능한 0730분에 아버지를 봤다. 그리고 평일에는 엄마와 동생이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돌봤다.


영등포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내가 잠시나 눈을 붙이려고 금요일 새벽, 토요일 저녁마다 갔었던 찜질방에는 시장에 오시는 상인분들 중국인들 다들 돈을 조금 아끼고자 시간을 때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잦은 다툼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있어 많이 시끄러웠다.

그렇게 병원생활을 이어가셨고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길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전신 중 상체 60% 3도 화상을 입었고 치료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원무과로 갔었을 때 치료비가 1억 정도가 됐었다.

아버지 친구라고 병원에 회사 관계자가 왔었는데 산업재해 처리를 해줘야 했지만 어렵다고 했었다. 치료비 해결이 막막했다. 그때 당시에 내 봉급이 한 달에 백십만 원 정도였는데 약 칠십오만 원씩 군인공제회에 넣고 있었다. 그게 내가 2년 조금 넘게 복무하고 모아뒀던 약 이천만 원 정도의 돈이었다.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은행에 신용대출을 위해 갔지만 복무기간이 짧고 계급은 낮았으며 장기복무에 해당하지 않아 신용대출은 천만 원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사회도 원망하고 직업군인에 대한 믿음이 천만원정도도 안 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당시에 부대원들이 내 사정을 듣고 헌혈증을 모아줬었다.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 군인공제에 모아둔 돈을 찾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모아둔 돈은 이것밖에 되지 않지만 이게 전부였고, 결혼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돈은 항상 부족하고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자 장남으로 선뜻 치료비에 보태려고 했다. 아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그다지 그렇게 모아둔 돈을 찾는 거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왜 항상 돈이 없지.?'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항상돈이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뒤로 병원을 여러 번 옮기시고 약 5년간 병원 생활을 하셨다. 그래도 살아계심에 감사했고 지금은 정상적으로 일을 하고 계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 돈이야 다시 벌면 되니까. 또 힘내서 잘 지내고 살면 되니까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들로서는 당연히 해야 될   

   고민거리도 아닌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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