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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가 피해자다

4-1.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서, 우리를 본다

by 이 순간


심리상담사 짠토커의 유튜브 영상에서 지나가듯 들은 한 문장이 유독 마음에 꽂혔다.

“요즘 시대엔 가해자 없이 모두가 피해자다.”

그 말에 강하게 동의했다. 솔직히, 나도 사과받고 싶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도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사과받지 못한 순간’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니까.





오랫동안 우리 가족 안에서 피해자는 어머니였다.

나는 그렇게 보았고, 들어왔고, 믿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엔 몸을 던져서라도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 자라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내게 각자의 고통과 피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역할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 관계가 불안정할 때 자녀가 ‘관계의 완충재’로 끼어드는 건 많은 가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겉으로는 가족이 단단해 보이지만, 그 중심엔 늘 조용히 중간을 메우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가족 내 삼각관계에 끼워진 아이였다.

보웬의 가족치료 이론은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한다.

부모의 불안정한 관계 속에 자녀가 중간에 서게 되면서 관계의 균형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갈등이 있을 땐 그 누구도 나를 감싸주지 않았고, 보호해주지 않았다.

나는 외면당했다.

엄마에게 기대거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엄마는 늘 힘들었고, 내가 도와야 하는 대상이었으니까.






첫째 아이가 백일쯤 되었을 때,

기력이 쇠한 몸으로 목욕탕에 갔다가 탕에서 나와 기절한 적이 있다.

눈을 떠보니 탈의실 평상 위였다. 누운 채로 ‘어떻게 집으로 가야 할까’ 걱정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엄마를 부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아예 엄마를 떠올리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어느 날,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전부터 급성 위염처럼 아팠는데 대상포진이래.”라고 말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도 코에 수포가 생겼는데 대상포진인가? 병원 가봐야겠다.”고 하셨다.


우리 사이엔 늘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었다.

나는 듣는 사람이었고, 나의 고민은 되돌아오지 않는 말이었다.

정말 아플 땐, 나도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떤 날은 갑자기, 아무 일도 없는데 눈물이 터진다.

운전하다 울고, 집에 혼자 있을 때 울고, 마음이 왜 이리 아픈지 나도 모른다.


상담을 공부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첫 상담을 받으며 그 믿음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상담이 딸을 이상하게 만들어놨다.”라며 푸념하셨고,

나는 그런 엄마를 붙잡고 울며 내 얘기를 쏟아냈다.

분노와 원망이 섞인 말도 많이 했다.

그때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피해자였다.


그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부모님의 이야기 속에서 ‘누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서로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마치 교통사고 과실 비율을 따지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몇 퍼센트,

아빠는 몇 퍼센트,

그리고 나의 피해는 몇 퍼센트였을까.


그러나 상담은 그다음 문장도 가르쳐주었다.

모두가 피해자다. 그리고 모두가 가해자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만 기억했지,

내가 부모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대못을 박았는지는 세어보지 않았다.

‘피해자’라는 자리에 앉은 채 부모님께 수많은 괴로움을 되돌려주었다.


사실 관계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그렇게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어떤 날은 내가 피해자였고, 또 어떤 날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가해자였다.

대부분의 관계는 그렇게 엇갈린 감정과 역할 위에 서 있다.


나는 이제 부모님이 원하는 걸 알면서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여자는 말을 잘해야 한다. 지참금이 없으면 말을 가르쳐 보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예전엔 그런 말에 맞춰 사근사근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려 노력했지만,

지금은 싫으면 하지 않는다.

그런 내 태도를 부모님께선 차갑고 서운하게 느끼신다.

돌이켜보면, 내가 드린 상처는 그것보다 셀 수 없이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내게 준 상처는 세세히 기억하면서,

내가 드린 상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다.

가족을 넘어 사회로 시선을 넓혀도, 피해와 가해의 경계는 여전히 반복된다.


시대와 문화가 바뀌면서 피해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엔 권력의 중심이 명확했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늘어난다.

피해와 가해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며,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면서도, 자신이 준 상처는 쉽게 잊는다.

모두가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가해자다.






상처는 오래 남는다.

그러나 치유의 시작은 타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보듬는 데 있다.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먼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잠시 소식이 뜸할 예정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2주 정도는 브런치에 자주 들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도 세이브해 둔 글들은 예정대로 올라갈 예정이에요.

혹시 제 방문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실까 봐
짧게 안부를 남깁니다.

기다려주신다면, 곧 다시 따뜻한 마음으로 인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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