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육아가 체질
11년 육아,
밀도 높은 집육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육아 초반에는 엄마와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강했고 보란 듯이 혼자 잘 키우는 걸 보여주자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
아이들 보다는 자기의 삶이 더 소중한 엄마였고,
일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자기 계발에 진심이신 분이다. (아이 돌잔치 날도 잠시 참석했다가 본인 스케줄 때문에 빨간 코트 곱게 차려입고 급히 가신 분…..)
아이가 예쁜 행동을 할 때면
‘아니 엄마는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어떻게 할머니한테만 맡겨두고 살 수
있었지?’하는 마음에 미움은 더 커져만 갔다.
아이를 낳아보면 엄마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데 나는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쌓여갔다.
아이가 여섯 살쯤, 고열에 폐렴으로 입원을 했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너무 건강하던 아이였기에
그 가느다른 팔에 혈관을 겨우 찾아 태어나 처음으로 수액 바늘을 꽂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때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엄마는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나는 마흔 하나였는데도 너무 무서웠다.
스물한 살에 엄마가 되었던 엄마는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며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섭고 두려운 감정을 많이 느꼈을 거라는 생각..
그럴 수도 있었다고,
육아에 모든 걸 바치기엔 세상도 잘 모르는 아기 같은 나이였다고… 엄마가 아닌 같은 여자로서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될 뿐 용서를 한 건 아니라 아직 엄마와 나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정확히는 내가 쳐놓은 장벽이고 엄만 자꾸 기억 안나는 척 없던 일로 만들려 내가 쳐놓은 장벽을 자꾸 허락 없이 넘는다.. 그게 더 싫은데…)
세상 모든 모녀 사이가 애틋하고 각별해 보이지만 속속들이 들춰보면 각자 말 못 할 사연 한두 개씩은 다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해보며 나는 나를 위로한다.
신랑 직업 특성상 점심 즈음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
주말에도 출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해 거의 모든 날
나는 아이를 독점하는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육아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중 8할은 체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함도 여유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출산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수액이라는 걸맞아봤다. 그전까진 치과를 몇 번 간 것 말곤 병원을 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나의 이 건강과 체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생각해 보면 엄마기 키우는 동안 딱 하나 잘했었던 삼시세끼 정성스레 챙겨 먹였던 것!
또 하나,
스물한 살의 남자와 여자는 얼마나 건강한 나이인가? 그 시절(1960년대는 흙 퍼먹어도 되는 무공해 세상이었고(?) 둘 다 시골 출신이라 흙의 질은 더 좋았을 거라는 나의 추측…) 그 두 젊은이들 체력의 콜라보인 나!
그 덕분인지 원래도 국대 체력이었지만 독점 육아 11년 차인 지금까지도 지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듯하다.
요즘에는 마흔을 넘기고도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결혼할 당시에는 서른다섯도 꽤 늦은 나이였다. 스무 살을 시작으로 결혼하기 전까지 15년을 남부럽지 않게 음주가무를 즐기며 열정적으로 보냈다. 직업상(전직 벨리댄스 지도자) 업무의 연장이라며 술자리의 피날레는 클럽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드라이아이스 냄새를 지겹게도 맡고 다녔다. 그랬던 내가 결혼하고 11년, 자유부인? 그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노는 게 지겨워 새로운 게 없을까.. 하고 한 게 결혼이라 그런지 노는 삶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었다.
주변에 친한 동생들을 보면 일주일에 한 번 허락되는 그날을 위해 나머지 6일을 버틴다는데 집이 제일 편하지 않냐고.. 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시절을 지겹도록 함께 놀았던, 함께 새벽이슬을 맞고 다니던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사는 사촌 동생이 유일하다.
주량 총량의 법칙도 애초에 다 채웠으니 나는 육아에 집중하며 행복 총량의 법칙을 아이와 또 남편과 바짝 채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