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금연 100일째에 생긴 일

by 블루랜턴

그것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김장 김치도 아니고, 재난이나 전쟁 같은 비상사태를 위한 식량도 아니건만, 남편은 언제나 3개월치의 담배를 집 안에 쟁여놓곤 했다. 남편 옷장을 열면 위아래 어느 구석에 담배 백 갑이 들어있는 상자가 다소곳하게 보였더랬다.


하루에 한 갑 이상을 피워댔으니 석 달이면 90갑(때로는 100갑)이다. 마트에 가면 언제라도 살 수 있는 담배를 한 번에 열 갑도 아니고 백 갑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강박에 가까운 수준이다. 주머니에 담배가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잠자기 전까지, 하루를 담배로 열고 담배로 마무리한다. 담배에 관해서라면 세상 부지런한 일개미 수준이다.


남편이 금연 시도를 몇 번 해본 적은 있다. 그러나 오로지 가족의 권유와 협박에 의해서였을 뿐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에는 매번 진심이 없었고 결국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간식거리를 더 챙기는 등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해져 다시 원래의 하루 한 갑으로 돌아오는 것이 반복되었다. 급기야 '죽을 때까지 이제 금연은 없다.'며 모두의 입을 막아버리고 말았는데,


그랬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암 앞에서는 남편도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상습적인 핑계와 잔머리를 버리고 절실하게 금연을 시작했다. 폐암환자에게 흡연은 항암 치료효과를 떨어트릴 뿐만 아니라 100%의 재발률을 가져다준다. 하루 종일 유튜브를 드나들며 암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남편이 이것을 모를 리 없다. 가족의 협박보다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죽음과 통증에 대한 생생한 공포에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금연을 시작한 후 불안과 우울, 분노와 짜증을 동반한 금단현상으로 본인과 가족 모두가 힘들었으나, 남편의 의지는 굳건했다. 달력에 적어놓은 숫자가 금연 20일째, 50일째, 75일째로 점점 늘어나더니 곧 100일째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빠! 금연 100일째 되는 날에 보상선물로 뭐 해드릴까요?"


아들로부터 '보상'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남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광속으로 번져나갔다. 담배와 피나는 싸움을 벌인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사실로 보상은 이미 충분했던 것이다. 남편이 아이처럼 좋아하면서도 선뜻 뭐라고 말을 못 하고 있을 때,


"아이스크림?"


며느리가 남편 대신 답해준다.


그동안 담배와 더불어 모든 단 것들과 가공식품을 끊은 것을 저들도 알기에, 100일 만에 한 번 먹는 아이스크림쯤은 봐주겠다는 눈치를 먼저 내비친 것이다. 무심한 듯 세심한 그들의 배려로 금연 100일 포상선물은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으로 정해졌다. 단 것을 끊는 것은 담배를 끊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과자와 라면을 끊어본 사람은 안다. 그러므로 아이스크림은 남편에게는 큰 선물이다.


드디어 금연 100일째가 되는 날 저녁,

백일잔치라도 하듯 아침부터 삼색전을 부치고, 불고기를 하고, 김을 굽고, 미역국을 끓이고 덩달아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남편은 자랑스럽게 으스대고 뻐기며 음식 간을 보고 짜네, 싱겁네 내게 타박을 놓는다.


'딩동~'


아들이 커피맛 아이스크림 한 통을 안고 들어오고, 며느리는 자신이 만든 '축-하-합-니-다' 미니 플래카드를 선반에 붙이며 활짝 웃어준다.


1등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남편이 주저 없이 아이스크림을 한 그릇 퍼서 뚝딱 끝내고 다시 또 한 그릇을 퍼낼 때, 아무도 그만 먹으라며 말리지 않았다.


며칠 후,

남편은 옷장 속에 남아있는 2개월치 담배를 상자 채로 가져다가 모두 반품처리했다. 상자 안에는 그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한 움큼의 미련도 섞여있었다. 이제는 옷장을 열면서 마음이 복잡하지 않아도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옆집 대니얼 아저씨는 못하는 게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