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처럼, 천천히 맑아지다
일에 쫓기다 보니 며칠 만에야 양평에 내려왔다.
3도 4촌의 꿈을 꾸고 있지만, 일이라는 무게는 쉽게 내려놓을 수 없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 많다.
바쁘게 흘러가는 도심과는 다른, 차분한 새벽 공기 속 청명한 새소리가 잠을 깨웠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다. 작은 집 안을 가득 채운 음악과 따뜻한 커피 잔을 손에 쥐고 잠시 숨을 고른다. 이 순간, 이 여유가 소중함과 동시에 가슴 깊은 행복감으로 다가온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혼란스럽고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꽃을 가꾸고 텃밭을 일구는 로망은 2차적인 부분이었고,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내면의 방황 끝에 자연스레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두 바퀴 돌고,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처음 맞이했던 봄과 이번 가을,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사진관을 했다. 기사들이 대여섯 명 있었으니 작은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바쁜 부모님 때문에 방학이 되면 친척집에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냈다. 나는 이모댁에 맡겨졌는데, 한 살 아래 사촌 동생이 있었다. 한 살 아래였지만 한 번도 '언니'라는 호칭을 쓴 적이 없어서 매일 싸웠고, 싸우다 보니 몹시 미워졌다.
방학이 끝나 엄마가 데리러 온 날, 그 사촌 동생이 내가 아끼는 소중한 머리핀을 갖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내 허락 없이 핀을 내어주었다.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며, 당시의 감정마저도 생생하다.
만약 삶의 끝에서 주마등처럼 스치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그날의 일도 떠오르지 않을까.
긴 타원형으로, 진초록 빛깔이 영롱했던 아름다운 핀이었다. 어린 마음으로는 억울하고 아까웠지만, 결국 그 예쁜 핀은 내 손에서 떠났다.
지금 만약 그 핀이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면 어떨까.
그때만큼 예쁘고 소중하게 느껴질까?
현재의 나는 성장했고,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가치도 이젠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를 울렸던 그 진초록 머리핀처럼, 성장하면서 내면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처럼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닌 이유다.
이 집에 내려와 내면의 길을 찾아 명상도 했고, 관련된 책들을 탐독하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일상을 보내며 고요한 공간 안에서 내면으로 서서히 침잠할 수 있었다.
흙탕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라앉아 서서히 맑아지듯이, 내 마음도 차분히 정리되었다.
묵은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며, 시간은 나를 천천히 치유해 주었다.
멀티 우주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 집에서는 다른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울을 바라보듯 나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게 되면서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내면으로 모아진다.
내게 괴로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사람들은 그 당시 내 그릇에 딱 들어맞는 인연이었다는 자각이 왔다. 괴로움을 가져왔던 원인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 그릇이 크고 깊어지면 그것에 걸맞은 인연들이 들어차게 될 것이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의 교리에 깊이 빠져드는 요즘이다. '번뇌 즉 보리'라는 불교용어가 있다. 번뇌는 '모든 나쁜 마음 작용'을 가리키며 보리란 '깨달음의 주체'라고 한다.
원불교대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무리 극락세계라 할지라도 번뇌심이 일어나면 지옥이 되고, 지옥이라 할지라도 보리심이 일어나면 극락이 된다.
"중략"
은적 관계의 입장에서 번뇌는 깨침의 거름이 되는 바, 번뇌가 침노할 때마다 자신을 진급시킬 공부의 기회가 왔음을 알아서 이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삼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뜻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번뇌는 깨침의 거름이라는 말, 번뇌가 올 때마다 자신을 진급시킬 기회로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번뇌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씨앗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이 고요한 공간이 작은 깨달음들을 가능하게 했다.
진정한 깨달음을 체득한 사람이라면 시공간의 제약이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하기에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다. 내가 성장할 수 있었고,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선물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공간이다.
이곳으로 온 결정은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