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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인 Nov 19. 2024

도심 속의 둥지

파리에 머무르던 어느 연말의 일기를 바탕으로 쓴 짧은 소설 :






 배낭을 발치에 내려둔 채 지하철 맨 앞칸에 앉아 질주하던 이인은, 문득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그녀를 기다리는 이와 장소가 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학교를 다니다가 관두고도 계속해서 소일을 찾아가며 이곳을 떠나지 않은 지 벌써 수년이 되어가는 그녀에게는, 이 도시에서 언제 멈춰버려도 상관없는 공중화장실인 양 방치되는 지하철이 유일하게 언짢은 요소였다. 사람들이 이제 '지겹다'고 평하는, 불법적인 사업을 사사로이 거리 위에서 도모하는 체류자와 이민자들의 정경도, 그들이 이따금 그녀로부터 지갑을 훔쳐보려 하는 시도도, 취미 비슷한 것으로는 자존심밖에 남지 않은 사무직장인들이 실은 오늘 일 처리를 할 기분이 아니라고, 우리는 혁명의 나라답게 노동권을 가능한 한 확대해석할 것이고 그러므로 네가 요청한 업무를 바로 해 주지 못하겠다고 부리는 변덕도 이인에게는 전부 괜찮게 느껴졌다. 파리니까. 여태 죽거나 추방당하지 않은 일 자체를 그녀는 행운으로 여겼다. 마치 엄청난 미인이 그녀의 구애를 너그러이 놔두듯이.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가 하는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낚아챘다. 역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은은한 안개가 내려앉아 있고 공원으로부터 풀 냄새가 풍겨오는 오후였다. 연인의 눈빛이 촛불의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는 레스토랑. 부모님 중 한 명이 오븐에다 무거운 접시를 내려놓고 나서 타이머를 막 누른 저녁. 여자친구가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서점. 남자친구가 와인을 들고 앉아 있는 강가. 이인에게 왜 없는 건가.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왔는지 반문했다. 그 반대였다. 그녀가 늘 먼저 말을 걸지 않았나. 심지어 저런 류의 인물들이 한때 그녀를 둘러싸고 존재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생각한 '진짜' 사람들이 아니었을 뿐이다. 이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물을 마시는 행위만큼이나 본능적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이인은 실수로 배낭을 두고 내렸다. 몸이 먼저 튀어 나가고 말았는데, 길어진 지하철 여정을 무의식적으로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배낭의 무게는 종종 그녀 자신의 삼분의 일, 그 이상에도 달하고는 했다. 그녀에게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마음이 쓰이는 책 다섯 권을 챙겨 나선 뒤 일과 내내 그것들을 읽지 않고 여섯 번째 책을 그리워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노트북과 몇 가지 전자기기까지 더해지면 손쉽게 그 도시에서 가장 무거운 배낭이 되고는 했다. 그녀가 자랄 때 이 정도로 예측 불가한 꼬마는 아니었다.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고 해서 몸을 혹사하는 것까지 즐기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느 나이에 이르렀을 때부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에 소소하지만 이토록 그녀에게 끊임없이 상기되는 어떤 비정상성은 이인의 마음속에 남은 이상향의 유일한 징표가 되었다. ‘내게는 간절히 원하는 무엇이 있고, 그래서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어. 그게 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지상까지 향하는 네 개의 층계참 중 첫 번째 층계참을 올랐을 때 허전한 등을 알아차린 그녀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웬일이니 이인아?” “오늘 점심 같이 먹기로 했었잖아,” “그랬던가 참?”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방금 지하철 안에다 배낭을 두고 내렸거든.” “저런, 잘 찾아보렴.” “고마워.” “손님들하고 차를 들던 중이라 이만 끊는다.”
 이인은 역무원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파리에 분실물을 신경 쓰는 역무원이 있던가, 참? 찾아가 보려던 생각을 지운 그녀는 승강장을 향해 내달렸다. 방금 떠난 열차가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지만, 어쩌면 식사를 하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이인은 인생의 사랑이 그 안에 타고 있다는 듯 서둘렀고 그런 마음이 인연을 재촉하기도 할 것이라고 믿었다.
 
 
*
 
 
 엄마와 지하철…… 악몽이었다. 무엇보다 습작이 든 노트북을 내동댕이친 장면은 그녀의 이마와 목덜미 주위로 식은땀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목 끝까지 덮여있던 이불을 그녀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걷어찼다. 크리스마스 이브. 함께 사는 케빈이 늦은 밤에야 출장에서 돌아올 예정이지만 이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의 선물을 사러 나갈 작정이었다. 선물을 위한 연휴 쇼핑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들뜨게 만드는지, 그녀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남은 머플러 재고는 검은색과 회색밖에 없다는 통보를 받고서, 그녀는 다섯 정거장쯤 떨어진 또 다른 랄프 로렌 매장으로 향하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케빈은 대다수의 파리지앵과 달리 무채색을 혐오했다. 하기는 그도 파리 출신이 아니었다. 산에서 나고 자란 그의 몸은 다부졌지만, 저녁에 텔레비전 대신 책을 보며 흥미로운 의문점을 제시할 줄 알았더라면 그녀의 장래 아이들의 아버지로 적합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며칠 전 일기장에다 끄적였다. 조만간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고 그가 번번이 언급했지만 이인은 그와 함께 하는 결혼생활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짐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 것 이상의 라이프파트너적 추구를.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아직 정해진 직업이 없었다. 그녀는 잠깐 다녔던 출판사에서 만난 동료인 자크가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몇 주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그를 찰 수 있는 걸까? 그러기에 자크는 한없이 착한데. 내일 이맘때 케빈의 부모님 댁에다 짐을 풀고 나서 스키를 타러 나가는 자신을 상상하자 그녀의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스키를 한 번도 타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인은 설산의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는 온천에 가보고 싶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없고, '프랑스인 답게' 식사 시간마다 설전을 벌이는, 그래서 종국에는 케빈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 전체가 설전을 벌이게 되고 이인은 곧잘 투명인간이 되는 상상을 하는 부모님 댁에서 며칠 간 묵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연말에 가족 단위로 함께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난 사실을 다시금 복기하자 그녀는 승강장에서 눈물이 맺힐 정도로 감격에 젖었다. 남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동선이 길어짐에 따라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나온 일을 후회했다.

 객차 안에는 끔찍한 냄새가 풍겼다. 누군가 차 안에 방뇨를 한 흔적이 있는지 보기 위해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혹은 그 반대이게도 그런 것은 없었다. 역한 냄새로 인해 그녀는 자리와 자세를 몇 번이나 옮기고 고쳤다. 문 쪽에 서 있던 그녀는 객차 한가운데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조금 누그러진 기분이 들었던 그녀는 이내 현기증을 느꼈다. 캐리어를 가지고 앉은 옆자리 외국인 노부부도 분명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리라. 파리 태생이 아니지만 역시 파리지앵인 이인은 그들이 안타까웠고, 머쓱한 마음에 코를 막고는 얼굴을 보란 듯이 찌푸렸다.

 건너편 좌석에 앉은 한 사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 사람이 있었나. 어디서 무엇을 머리에 뒤집어 쓴 뒤 몇 달 며칠을 보낸 건지 알 수 없는 몰골을 한 남자가 녹색 반바지와 얼룩진 스웨터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 그는 어딘가 새를 연상시켰다. 도심에 사는 새들이 도저히 생명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만한 잡다한 것들까지 주워다가 둥지를 건축하는 영상을 그녀는 전에 어디에선가 봤었다. 그는 한 마디로 도심 속의 둥지였다.

 지금껏 파리에서 부랑자들의 얼굴을 자세히 본 일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대개는 시꺼멓고 행동이 산만하니까 그녀가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도심 속의 둥지는 눈물을 흘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수년간 사기꾼들의 소굴에서 착취를 당하다가, 바로 어제 그 사실을 깨닫곤 탈출한 사람처럼 긴박하고 처연해 보였다. 그러나 안도하기는커녕 이제부터 ‘진짜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망연자실한. 여전히 그곳의 동료들과 침대가 그리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은 비교적 새하얬는데 이것이 그가 그녀에게 있어 다른 부랑자들과 구별되는 지점이었다. 이인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발작할 것 같아서 불안했다. 노인 한 무리가 승차함과 동시에 그녀는 자리를 내어주며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열차가 빠른 속도로 검은 터널을 지나치자 차창 위로 이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혼자의 외출 외에 해야 할 일이 없는 사람의 맑은 얼굴이었다. 연말의 분위기에 약간은 달뜨고 긴장한 듯도 보였다. 옮겨온 객차에는 사람이 붐볐다. 그녀가 다시 생각해보니 다른 파리지앵들은 진작에 도심 속의 둥지를 피해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그 노부부와 같은 이방인들만이 그의 근방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도심 속의 둥지는 어떤 연유에선지 지하철을 타고 온종일 돌거나, 어딘가로 향할 생각을 했다. 그에게는 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 걸까? 갈증만큼이나 절박한 궁금증이 이인에게 몰려왔다. 그가 열차를 타고 향하는 파리 저편에는 이 연말에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어떤 상상 혹은 확신에 이르렀을 때 이인의 무릎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거울 앞에서 머플러들을 목에 대어본 그녀는 자신의 피부에 잘 어울리는 색이 그의 피부에도 어울릴지 헷갈렸다. 새끼발가락이 아팠다. 아침 인사를 나눈 이후로 자크에게서는 답신이 없었다. ‘올해는 조용히 보내려고.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 돼!’

 이인은 케빈에게 색을 물어보려다 관두었다. 사진을 보내지 않는 이상 설명하기가 복잡했고 결국에는 ‘상관없어’라고 답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뭐할래??’ ‘길 막히는 파리는 생지옥이야. 빨리 침대에 눕고 싶어.’ ‘그러면 집 앞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고 돌아와서 쉴까? 거기 진짜 맛있잖아.’ ‘소파 위에서 영화는 어때 (흐뭇한 이모지) 감성적인 건 졸리니까 블록버스터나…… 냉장고에 먹을 거 있어 자기야?’
 끝내 자신에게 덜 어울리는 색상을 계산한 그녀는, 교차로에서 사람 머리만 한 꽃다발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밀며 날개 돋친듯 팔아대는 연말 꽃장수를 지나쳤고, 맞은 편에서 걸어오다 '헤이 이쁜이'라고 외치며 자신 볼을 톡 건드리고 스쳐간 금발의 중년 남자를 잠시 겪었으며, 마침내 도시의 지하를 관통하는 잿빛 열차에 입장해 치마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좌석에 앉았다. 발을 쉬게 된 그녀는 그제야 안도했다.

 몇몇을 뺀 승객이 전부 달아나 홀로 칸을 차지하게 된, 낮에 본 도심 속의 둥지가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이인은 평소에 ‘둥지’라는 말과 개념을 좋아했지만 좀 아까 목격한 것은 처참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명히 드러내 보인 처연한 표정. 그 장면이 그녀의 부드러운 심장 한구석을 누르고 있었다. 닳고 닳은 수치심을 부랑자들은 갖다버린 지 오래일 거라고, 그녀는 믿었었기 때문이었다. 슬픔과, 염원 같은 것을 포함하여.

 플라스틱 조각과 빨대, 담배꽁초 같은 것까지 분별없이 둥지 재료로 갖다 쓰는 새가 어딘가 존재한다니, 그녀는 본 적이 없음은 분명하고 아득히 멀리 있을 새의 심정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니. 남들이 종종 ‘깨어나!’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깊은 공상에 빠져들곤 하는 이인의 표정은, 그럴 때마다 우는 사람처럼 보였고 동시에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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