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젠가 이 간극 사이에 끼어 죽고 말 거야'
난 원한다면 기꺼이 광대도 될 수 있고 공주도 되어줄 수 있어. 네가 내 진짜 얼굴을 보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는 알아차렸다. 그녀의 웃음이 거짓임을. 상대방을 향한 관심 어린 질문과 시선 속 숨겨져 있는 그녀의 철저한 무감각과 무관심을. 그녀도 그가 자신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고 그녀는 그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싫어 피했다. 그는 눈치는 빨랐지만 연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듯 보였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비껴갔다. ‘불쾌하고 불편해... 정말이지 거슬려.‘ 그게 다였다. 그들은 서로를 불편해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가 모른 척 연기만 해줬어도 무엇이든 되어줬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며 곧 아무렇지 않게 그를 잘라냈다. 버린 쪽도 버림받은 쪽도 없는 깔끔한 마지막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성가시고 피곤했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미르 아니니? 잘 지냈어?”
“네. 안녕하세요.”
“그래, 미르 네가 올해 몇 학년이더라? 졸업은 했니?”
“이제 막 졸업했어요.”
“그래? 그럼 취업은? 계획은 있니?”
“뭐, 준비해야죠.”
“연애는? 남자친구는 있고?”
“아뇨. 없어요.”
미르는 몇 번째 반복되는 패턴의 대화를 계속하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놀랍지도 않은 수준. 식사 자리가 이어지며 나오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미르는 꿈이 뭐니? 하고 싶은 일이 뭐야?”
미르는 속으로 ‘진정 이 사람들이 내 꿈에 관심이나 있을까…’ 생각했지만 곧 적당한 답변을 지어 내놓았다.
이어 또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우리 현우도 고등학교 입학하는데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미르가 조언 좀 해주라. 어쩜, 넌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잘 갔잖니.”
‘글쎄요…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충고, 조언 이런 말들이 좀 웃겨요. 전 현우란 아이와 대화해 본 적도 거의 없고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서 어떤 말이 독이 되고 또 어떤 말이 득이 될지도 모르는데 대체 어떻게 함부로 조언을 하죠? 사람들은 늘 자신이 못다 이룬 것들과 아쉬웠던 것들을 조언이랍시고 하지만 그건 단순히 본인의 자격지심 섞인 때늦은 후회일 뿐이고, 자신에게 도움이 됐다고 해서 남들에게도 똑같이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지나친 오만 아닐까요? 또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성향, 꿈과 목표가 전부 다른 만큼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도 다른데, 제가 책임지지도 못할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라고 미르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을 삼키며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어머, 현우가 벌써 고등학교에 가나요? 시간이 참 빠르네요.”
“그럼, 시간 참 빨라… 그러고 보니 우리 미르는 남자친구 없다고 했나? 이상형은 있고?”
미르는 눈을 잠깐 질끈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또 시작이군. 이상형… 대체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럴듯하게 적당한 거짓의 답변이었다. 이후 몇 번 더 시시하고 지루하고 의미 없는 대화들이 오갔다. 미르는 지칠 대로 지쳐 멍하니 식탁 모서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러다간 언젠가 이 간극 사이에 끼어 죽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