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향 동네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던 내 20대를 돌아보며
돌이켜보면 아주 호기로운 마음 가짐도, 원대한 꿈도 없었다. 그저 ‘나만의 경험과 그것들이 바탕이 된 삶’을 마주하기 위한 첫 과정이란 생각이었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 드는 일에는 낯선 설렘이 따랐다. 어린 나는 작은 바닷가 마을과 작별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I still remember a brave, exhilarating 19-year-old self stepping into the new country in a new continent alone to accomplish my goal of 20s - filling my life with experiences despite the uncertainty and fear. […] I thought this is the time I should be brave again for something new”
(한국에 돌아오며 인스타그램에 썼던 글)
나는 유럽에서 7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그리고 또 다른 도전을 기대하며 용감함을 아주 잃어버리기 전 한국에 돌아왔다.
내가 만 19세 때 (정확히는 19세를 한 달 가량 앞둔 18세 때) 유럽에 첫 발을 딛었다. 난생 처음이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20대를 경험하기로 무모하게 떠난 것이다.
홀로 서기의 첫 날이 아직도 촘촘히 시간 순으로 떠오른다. 고속 버스에 올라 혼자 인천 공항으로 떠났던 일, 멀리 떠나는 딸을 보며 계속 울던 여린 엄마, 그런 엄마 앞에서는 씩씩하게 웃다가 돌아서 혼자 울던 당시의 나 자신, 그리고 내 몸집 만한 큰 짐 가방 두 개까지.
2년 전, 유럽에서의 7년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했다. 이따금 내가 살던 곳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돌아온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만큼 속 후련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시간을 보냈다. 성취의 경험도, 실패의 경험도, 기쁨도, 슬픔도, 끝없는 외로움도, 그리고 그 시절 그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다양한 도전들까지. 후회 없이 순간에 열심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그리운 것은 그 ‘시절’이기에 이건 단순히 그 나라로 돌아간다고 해서 회귀되지 않는다는 것을. 학생이던 나, 나의 친구들, 그 거리의 사람들 등 이 모든 것은 흘러간 시절이며 나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런 그리운 시절은 있다는 것을. 그러기에 최선을 다한 그 시절은 그 모습대로 넘겨두면 되는 것을.
그렇지만 그 당시의 기억들과 생각들을 모조리 잊기엔 너무 소중해 기록할 의미가 있다. 내가 친구들한테 자주 하는 말 “이거 다 나중에 실버 타운 들어가면 곱씹을 추억 거리야” 하듯 늙은 내가 재밌게 들여다 볼 거리를 준비해두는 연금 저축과 같은 행위라고 할까.
결정적인 순간은 뜬금없이 발생하곤 한다. 이 흐름이 마무리된 후 돌이켜 보면 나에게 발생한 사건들의 연속성이 너무나 드라마 같다. (당시는 내 인생이 멋진 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고 절대 생각 못하지만).
나는 원래 경영을 공부했는데 그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성적 좋은 문과생이 진로 상담을 받을 때면 대부분의 선생님은 경영학과 또는 경제학과를 추천해준다. 고등학생 나는 ‘어떤 방향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있어도 ‘명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회인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미약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 사람에게 들이미는 대학 학과 선택지는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여하튼 당시의 나도 그 부담감을 회피하고 싶었다. 나만의 인생을 위해 멀리 유럽까지 떠나는 대범한 학생 치고는 무난한 전공의 선택지를 택했다.
대학 생활에 대한 낭만은 있어도 대학 공부에 대한 낭만이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그 극 소수에 내가 포함될 줄 생각도 못했다. 당시 나에게 경영 공부는 따분했다. (철저히 내 기준에서). 이 사회에 회사의 존재성이 주는 의미와 역사 등 폭넓은 시선에서 채 생각해볼 기회 없이 회사 내 회사원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일에 대한 강의를 듣는 일은 실망스러웠다. 그제서야 머릿속에 생각나던 나와 동생을 향해 어릴 적부터 해주던 엄마의 말.
“나는 너희가 대학에서 너만의 세상 보는 눈을 키울 기회를 갖길 바란다. 어떤 한 학문을 깊게 공부하고 다양한 서적을 읽고 많은 걸 경험하면 그 시간이 인생의 가치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시기가 된다”.
뒤늦게 엄마의 말에 울림을 느끼며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하고 무모하게 자퇴했다. 자퇴 전 우연히 읽은 흥미로운 정치 외교학 논문들도 한 몫 했다. 합격의 결과도 나오기 전 무모하게 세 군데 학교의 정치 외교학을 지원한 후 자퇴하고 파리로 떠났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대도 못했던 제일 좋은 학교에 입학하게 된 나는 정말 피 터지게 공부했고, 학생회도 2년 연속으로 활동했다. 학과에서도, 학생회에서도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초반에는 영어 제일 못하는 사람이 나였을 테다. 매주 고급 에세이 제출이 주요 과제인 학과에서 에세이 스킬 때문에 과락할 뻔도 했지만 1학년 마지막 에세이로 탑 3 안에 드는 점수를 받아냈다. 2학년 그룹 논문 때는 학과 1위를 했다. 학교 적응이 될 무렵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사장님의 부탁으로 그 집 아들 과외도 했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처럼 미약한 존재가 이 넓고 차가운 세상에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무서워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현지 회사에서 (그리고 이곳에도 또 혼자 한국인..) 내 기획안이 두 번이나 채택되어 동기들보다 더 많은 프로젝트 경험을 기록했다.
원 없이 노력했고 성취도, 간간히 실패도 했으며 이유 없는 무기력에 잠기기도, 샘솟는 열정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이 롤러코스터를 겪고 유럽 생활에 마침표를 찍으려니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다시 살펴보고 견뎌내는 힘’ 이 생겼다.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내 20대의 첫 챕터에 마침표 찍고서 돌아왔다. 그 동안의 이야기들, 더 과거와 더 최근의 이야기들에 대해 이제 펜을 들고 적어내려 한다. 나의 삶을 사는 과정은 나만의 이야기이고 레슨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와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야를 구성해준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