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간질이 아니라 뇌전증입니다
매년 2월 둘째 주 월요일은 ‘세계 뇌전증의 날’ 이에요. 뇌전증(腦電症, Epilepsy)은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간질(癎疾)’이라고 불렸던 병이랍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발병하는 만성 뇌질환인 이 병은 전 세계에 약 5,000만 명[1], 국내에도 약 37만 명의 환자가 존재해요. 뇌전증은 발작이라는 특이한 증상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다양한 오해에 시달려 왔고, 지금까지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2025년 세계 뇌전증의 날을 맞아, 오늘은 필톡과 함께 뇌전증에 얽힌 여러 오해를 의학적으로 바로잡는 시간을 가져 봐요!
인류가 뇌전증을 연구한 역사는 아주 길어요. 기원전 2000년 경에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중국 등지의 여러 문명권에서 진행된 의학 연구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랍니다. 심지어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성문법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도 뇌전증 환자와 연관된 내용이 존재해요[2].
뇌전증은 뇌 속 신경세포들이 비정상적으로 과잉되거나 동시에 흥분하면서 일시적인 신경 기능 장애가 일어나 발작(seizure)을 겪게 되는 만성 뇌신경질환이에요. 의학적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신 또는 부분 발작이 최소 24시간의 간격을 두고 2회 이상 나타날 때 뇌전증으로 판단한답니다[3].
일반인이 뇌전증을 떠올릴 때는 보통 갑작스럽게 쓰러져 심한 경기를 일으키다 의식을 잃는 전신 강직성 발작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요. 문제가 생긴 뇌 부위에 따라 신체와 정신 양쪽에서 다양한 강도의 뇌전증 발작이 발생할 수 있답니다.
뇌전증 발작은 정도나 증상, 지속 시간이 환자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게 나타나요. 또 발작 증상만 가지고는 다른 뇌손상을 원인으로 한 발작과 구분하기 매우 어려워요. 그래서 의심가는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는 꼭! 가까운 의료 기관을 찾아 전문적인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 때 환자의 증상과 지속 시간, 발작 후의 신체 상태에 관해 기록해 두었다가 의료진에게 전달하면 큰 도움이 돼요.
한때 인기 절정이었던 드라마 ‘응답하라1988’을 기억하시나요? 그 14화에서 뇌전증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왔어요. 주인공 덕선(혜리 분)의 학교 짝꿍이자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던 깍쟁이 반장(권은수 분)이 교실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고, 덕선이 훌륭하게 응급 처치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이처럼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같은 대중 매체에서 뇌전증을 묘사할 때는 흔히 멀쩡하던 인물이 갑작스럽게 전신을 뒤틀며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 탓에 뇌전증 환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시간 ‘악령’ 이나 ‘저주’ 에 홀린 사람, 또는 중증 정신병 환자로 오해받아 차별과 혐오를 당해 왔죠. 그러나 이는 전부 사실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뇌전증을 둘러싼 뿌리깊은 오해 4 가지를 의학적으로 풀어볼게요!
오해1) 뇌전증은 정신병이 아니에요!
흔한 오해로 뇌전증을 정신증(Psychosis)의 하나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뇌전증은 뇌의 전기적 이상으로 발생하는 신경증(Neurosis)의 일종이에요. 신경증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생활이 가능한 병입니다.
전자약에 관한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 우리 몸은 컴퓨터처럼 전기 신호로 움직여요.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회로에 정확한 전기 신호가 오가야 하듯, 인체 역시 뇌가 정상 신호를 보내야 바르게 움직여요. 그런데 여러 이유로 이 신호 체계가 망가져 이상 행동을 하게 되는 게 바로 신경증이랍니다. 그래서 망가진 신호를 복구하면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요.
요즘에는 뇌전증 치료제(항경련제 또는 항발작제)의 효능이 많이 좋아져서 약으로 증상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뇌전증 환자도 얼마든지 사회 생활을 잘 할 수 있어요!
※인체의 전기 신호 체계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오해 2) 뇌전증은 유전병이 아니에요!
과거에는 뇌전증이 접촉으로 전염되거나, 또는 유전되는 병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극히 최근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환자들의 결혼을 금지하거나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고, 심지어 자손을 보지 못하도록 불임시술을 강제하는 인권 침해가 자행됐죠. 심지어 미국조차 1970년대까지 여러 지역에서 주정부에 의한 강제적 중성화법(Sterilization law)의 적용 대상으로 뇌전증 환자를 명시했어요[4].
물론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유전을 원인으로 한 뇌전증 발병률은 전체 환자의 5퍼센트에 불과해요[5]. 실제 뇌전증 환자 대다수는 후천적 원인으로 뇌가 손상된 경우에 해당해요.
여러 연구에 따르면 각종 감염 및 질병, 외적 충격, 장애도 뇌전증을 초래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특히 중~노년기에 발생률이 현저히 올라가는 외상성 뇌손상은 뇌전증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입니다. 즉 뇌전증은 0세부터 100세까지 어떤 연령대에서든, 누구든,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병이랍니다.
오해3) 뇌전증은 선천적인
질병이 아니에요!
보건 당국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2~3만명 가량의 뇌전증 환자가 새로 발생해요. 심지어 최근에는 발병률과 환자 수 모두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랍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데이터를 사용한 한 메타분석 연구에 의하면, 국내 인구 중 뇌전증 유병률은 2009년에 1000명 당 약 3.4명이었는데 2017년에는 약 4.5명 수준까지 상승했고 발병률도 약간 높아졌어요[7]. 날이 갈수록 급감하는 출생률 추이와는 대조적이지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바로 최근 빠르게 진행 중인 우리 사회의 인구 고령화 때문이에요. 위 그래프에서 보듯, 뇌전증은 나이를 먹을수록 발병 확률이 현저히 상승하는 질환입니다. 특히 1)75세가 넘었거나 2)기존에 두부 외상을 입은 적이 있거나 3)뇌졸중, 4)치매 같은 퇴행성 뇌질환 진단을 받은 분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뇌전증을 겪을 확률이 훨씬 높아요.
그러니 위 4가지 조건에 해당하시는 분들은 본인이나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 평소 건강 상태를 주의 깊게 체크하고, 유사시 적극적으로 주변의 의학 전문가를 찾아 상태를 알리고 적절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오해4) 뇌전증은 난치병이 아니에요!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뇌전증을 ‘천질(天疾)’, 하늘이 내리는 병이라고 부르며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으로 여겼어요. 다행히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최근에는 효과 좋은 뇌전증 치료제(항경련제 또는 항발작제)가 많이 개발되어 치료에 쓰여요. 70%의 뇌전증 환자는 항경련제를 꾸준히 먹기만 해도 발작을 잘 제어할 수 있어요[9]. 즉, 뇌전증은 얼마든지 치료와 정상적인 일상 생활이 가능한 질병입니다!
다만 약으로 치료가 잘 되지 않는 난치성 뇌전증 환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어요! 최근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전자약 기술은 수술 부위를 최소화하면서도 난치성 뇌전증에 효과를 보이고 있어 장래가 주목되는 분야랍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함께 읽어볼 만한 이전 글: 전자약 이야기
뇌전증은 누구든 걸릴 수 있고, 또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에요. 약을 잘 먹어 발작이 잘 조절되는 뇌전증 환자는 고혈압이나 간질환, 당뇨 환자처럼 평범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이들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예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뇌전증 환자를 괴롭히고 있는 건 병증보다는 오히려 뿌리깊은 사회적 편견이었어요.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국내 뇌전증 환자에게 가해진 사회적 낙인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4% 이상이 병 때문에 취업 같은 사회적 활동은 물론 연애, 결혼, 친교 등의 사적 생활 중에도 차별 및 혐오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어요. 심지어 이들 대다수가 반복적으로 복수의 다양한 불이익과 혐오를 경험했습니다[10].
특히 스스로 병명을 밝혔거나 타인 앞에서 발작이 일어나 뇌전증 환자임이 주변에 알려진 경우 차별을 경험한 확률이 2배 이상 높았어요. 그래서 과반수 이상의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숨긴 채 생활하고 있었고, 심지어 필요한 치료를 받지 않고 있는 경우도 보고됐어요[11].
이런 심각한 사회적 낙인을 조금이라도 타파하기 위해, 한국뇌전증협회와 대한뇌전증학회는 2010년대에 ‘간질’ 이라는 병명을 ‘뇌전증’으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벌여 성공했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간질 대신 뇌전증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여요.
이번 세계 뇌전증의 날을 맞아 뇌전증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병이라는 걸 기억하시고, 열린 마음으로 주변에 손을 내밀어 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지금 항뇌전증 약을 드시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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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Epilepsy fact sheets. Published 2019. Accessed January 6, 2019.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epilepsy/
[2]Kaculini CM, Tate-Looney AJ, Seifi A. The History of Epilepsy: From Ancient Mystery to Modern Misconception. Cureus. 2021 Mar 17;13(3):e13953. doi: 10.7759/cureus.13953. PMID: 33880289; PMCID: PMC8051941.
[3][5][6][9]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 건강정보: 뇌전증. https://health.kdca.go.kr/healthinfo/biz/health/gnrlzHealthInfo/gnrlzHealthInfo/gnrlzHealthInfoView.do?cntnts_sn=5961
[4] Catte, Elizabeth. Eugenic Sterilization in Virginia. (2023, July 25). In Encyclopedia Virginia. https://encyclopediavirginia.org/entries/eugenic-sterilization-in-virginia.
[7] Lee SY, Chung SE, Kim DW, Eun SH, Kang HC, Cho YW, Yi SD, Kim HD, Jung KY, Cheong HK; Committee on Epidemiology of Korean Epilepsy Society. Estimating the Prevalence of Treated Epilepsy Using Administrative Health Data and Its Validity: ESSENCE Study. J Clin Neurol. 2016 Oct;12(4):434-440. doi: 10.3988/jcn.2016.12.4.434. Epub 2016 Jun 3. PMID: 27273925; PMCID: PMC5063869.
[8] Jeon JY, Lee H, Shin JY, Moon HJ, Lee SY, Kim JM; Epidemiology Committee of Korean Epilepsy Society. Increasing Trends in the Incidence and Prevalence of Epilepsy in Korea. J Clin Neurol. 2021 Jul;17(3):393-399. doi: 10.3988/jcn.2021.17.3.393. PMID: 34184447; PMCID: PMC8242311.
[10][11] Lee SA. Public Knowledge about and Prejudice against Epilepsy in Korea. Epilia: Epilepsy Community. 2021;3(1):29-34. Published online March 16, 2021. doi:https://doi.org/10.35615/epilia.2021.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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