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 없는 것들 지키기
90년대 초반부터 국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행을 좋아해서 다니긴 했지만 스스로 운전하며 다닌 건 이때부터였다. 지금까지도 모든 행동의 동력이 ‘궁금함’인 나는 ‘이야기’들의 현장이 궁금해서 여행의 방향은 언제나 그 ‘궁금함’에서 정해졌다.
그 ‘이야기’들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이 시의 강은 어떤 곡선을 가지고 있을까?, 이런 민요가 생겨난 마을은 어떤 서사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살까? 이 소설의 장면들은 어땠길래 이런 묘사가 나왔을까? 이 의문을 품고 가서 그 자리, 그 시간에 존재해 보겠다는 욕심이 컸다. 그런 탓에 나의 여행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잘 흘러갔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그 시간과 달빛도 당연히 궁금했다. 그 여행의 목표는 ’이효석 생가에서 자기‘였다. 물론 전화번호도 없고 봉평이라는 것만 알고 길을 떠났다. 봉평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이효석의 흉상이라니!
봉평에 들어서 이효석 생가라는 아주 작은 팻말 하나를 본 곳에서 장이 열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라 가게들은 파장 분위기였다. 가만! 이게 봉평장터 아닐까? 상인들에게 이 장터가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었더니 아주 오래되었고 그 시작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 분명 ’여름 장은 애시당초에 글러서‘로 시작하는 ’메밀꽃 필 무렵‘의 첫 장면인 그 봉평장일 터이다. 그러자니 길을 물어보았던 그 포목상 주인도 예사롭지 않았다. 주인공 허생원이 포목상이지 않나? 바로 그 여름장의 파장 무렵에 들어선 것이었다. 장터 뒤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니 움푹한 작은 들과 꼬불꼬불한 길이 나타났다. 7월 말에 갔는데 메밀꽃은 한 달 뒤에 피어서 소설에 묘사했듯이 ’소금을 뿌린 듯‘해지는 것인가 보았다.
이효석 생가라고 찾아가니, 방명록이 달랑 하나 놓여 있었다. 엄마가 너무 감격하니까 겨우 한글을 깨친 딸아이는 어디서 들은 말인지 ’이효석 열사님, 감사합니다.‘라고 삐뚤빼뚤하게 써 놓았다. 이때부터 집주인( 이 집 주인은 이효석 일가는 아니었다. 그 이후 지자체에서 매입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에게 재워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이효석의 방에서 자고 그 들에 충만한 달빛을 보겠다는 욕심으로. 하지만 주인은 여기는 숙박업체가 아니라고 너무나 단호했다. 일모도원(日暮道遠), 이 늦은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어디서 숙소를 구하느냐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어서 이효석이 마시던 우물의 물만 마시고 돌아나와야 했다.
그러느라 숙소를 구하기에는 시간이 정말 난감해져서 나오는 길에 식당을 겸하는 숙소에서 자기로 했다. 그래도 숙소를 구했다는 안도감에 짐을 풀고 밖을 보니 달빛이 온 천지에 가득하고 옆 개울의 물소리가 장했다.
아! 그때 알았다. 주인공 허생원이 아들일 것 같은, 동이의 듬직한 등에 업혀 건너던 개울이 여기 어디쯤이었다는 것을. 평생 외로웠던 허생원에게 단 한번의 사랑이 낳은, 그 아들의 등에 업혀가는 그 장면에, 충만했던 달빛은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했을까.
그 뒤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각 지자체마다 여행객들을 맞을 테마와 지점들을 찾아내고 치장하기 시작했다. 봉평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밀꽃 필 무렵‘을 테마로 한 공원에 메밀을 심고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주막이 세워지고 막걸리와 파전이 등장했다. 소설 속의 단어가 다 형체를 갖추어 한 마을을 이루었다. 하지만 나에겐 여행객에게 어떻게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을 느꼈다면 달빛을 배제한 테마공원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달빛을 지켜서 ’메밀밭이 소금을 뿌린 듯 흐믓하게‘ 되도록 어둑신한 듯, 밝은 듯 놓아두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그 달빛 속에서 다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나직나직 읽어나간다면 어땠을까?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밭과 달빛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