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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Nov 03. 2024

각자의 호(號)를 정하다

각자의 호(號)를 정하다


이런 프롤로그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사업가 친구 한 명을 제외한 4명이 이번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앞으로 연재될 내용에 이들이 계속 등장하기에 등장인물 소개를 간단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로드트립 8일 차, 세인트루이스. 여느 날처럼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1.5리터짜리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토크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화제가 삼국지로 넘어갔다. 삼국지 인물들 중 누가 좋은지, 그리고 그 인물들의 호가 무엇인지를 연이어 얘기하던 중 샌프란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호가 있어” 


그 친구는 자기 호를 자기가 지었는데 호는 석헌(石軒)이라 했다. 

돌 석자에 집 헌. 영어로는 Stone House. 


그 이유는 현재 샌프란에 있는 자기 집이 돌 위에 지어졌기에 그리 지었다는 것이었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호를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예전부터 더 늦기 전에 호를 하나 가지고 싶었고 그래서 스스로 짓기 위해 몇 번 생각해 봤으나 짧은 한자 지식으로선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와인으로 얼큰해진 샌프란 친구는 내 제안을 수락하며 이김에 우리 모두의 호를 하나씩 지어 주겠노라고 했다. 사실 이 친구는 호를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현직 교수다 보니 이래저래 독서량이 많은 것은 기본에다 한자 지식이 우리들 중 압도적으로 풍부했다. 샌프란 친구는 국민학교 3학년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1학년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와서 거의 7년 이상을 일본에서 살았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려면 한자 1,800자를 완벽하게 쓸 줄 알아야 하는데 그 능력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문에 나오는 한자를 겨우 읽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었다.


친구는 우리 한 명 한 명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즉석에서 일필휘지로 호를 지어 나갔다. 그 처음이 수행자 친구였다. 샌프란 친구인 석헌(石軒)이 처음 제안한 수행자의 호는 현암(玄岩)이었다. 검을 현에 바위 암. 평소 헤비메탈, 하드락을 좋아하는 이 친구에게 Black Rock이라는 영어로도 표현되는 현암은 꽤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행자 친구는 아주 흡족해하며 즉석에서 OK를 했다. 


그렇게 그는 현암(玄岩)이 되었다. 


두 번째로 내 호를 지었다. 처음에 얘기한 호는 이미 꽤 알려진 고려시대 스님 호와 발음이 같아 나는 사양을 했다. 몇 잔의 와인을 더 마시다 다음으로 석헌이 내게 제시한 호는 의미가 너무 뜬구름 같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사양을 하고 하나 더 지어달라고 했다. 석헌은 살짝 짜증을 내며 호는 이미지에서 떠오르는 것을 바로 지어야 하며 세 개 이상 추천하는 것은 예외적이라며 내일 한 가지만 더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첫날 내 호는 정해지지 않고 다음날로 넘어갔다. 

다음날 여행 9일 차, 헤이스(Hays)로 가는 차 안에서 석헌은 내 호를 제안했다. 


그것은 바로 벽하(碧河)였다. 

푸를 벽에 강 하. 영어로는 Cobalt River.


일단 첫 느낌은 나쁘지 않았는데 발음이 좀 걸렸다. 호는 부르는 것인데 ‘벼카’로 ‘격음화’로 발음되는 것이 어떨지 판단이 안되었다. 좀 더 생각해 보자 했다. 그리고 그날 밤 또 저녁 후 호텔에서 와인을 마시다 술김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카톡전화를 여기저기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 호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한 친구의 반응이 별로였다. 나도 찜찜하던 차에 친구의 반대 의견을 들으니 더 수락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또 내 호는 안 지어지고 다음날로 넘어갔다.


10일 차, 콜로라도 이글(Eagle)로 향하던 차에서 석헌은 최후통첩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벽하야. 하나 더 해달라면 해보겠지만 그 이상은 안 나올 듯하다” 


그래서 난 답했다. 


“오늘 저녁 이글 호텔에서 최종 결정을 할게” 


차 안에서 그리고 저녁 먹으며 혼자 생각해 봤다. 내 이름에 바다 해(海)가 들어가는데 강이 들어가는 벽하랑 어떤 조화로움일까? 좋게 생각해 보면 호는 보통 이름 앞에 쓰이니 푸른 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걸렸던 발음도 자꾸 부르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날 밤 이글 호텔에서 난 벽하(碧河)를 수락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블랙핑크 로제의 APT가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그 인기요인 중 하나가 한국어의 ㅋ,ㅌ,ㅍ 같은 격음들이 세계인들에게 익숙해진 결과라는 내용도 봤다. 내 우려인 발음 문제가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난 벽하(碧河)가 되었다.


9일 차, 헤이스(Hays)에서 멤피스 친구 호를 지어서 카톡으로 알려줬으나 그는 사양했다. 10일 차에 하나 더 지었는데 그는 또 거절했다. 그날 밤 카톡 통화에서 멤피스 친구는 자기 호에 대한 요청 사항을 얘기했는데 그것은 꽤 구체적이었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이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으며,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그런 반전 있는’ 


그런 강남스타일의 이미지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멤피스 친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헌은 한 마디 했다. 


‘미친놈 아냐?’ 


그리고 하나만 더 지을 테니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니가 미아리 점집에서 짓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통보했다.


10일 차, 이글에서 석헌은 멤피스 친구의 호를 채담(彩潭)이라고 지었다. 채색 채에 연못 담. 영어로는 Colored Pond. 


평소 연못처럼 온화하며 그러면서도 음악 쪽에 재능이 있는 친구의 이미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1일 차, 솔트레이크 시티 가는 길에 차 안에서 내가 카톡으로 세 가지 호를 다시 정리해서 보내줬다. 멤피스 친구는 채담을 수락했다.


그렇게 그는 채담(彩潭)이 되었다. 


10일 차 이글에서 한국에 있는 사업가 친구의 호를 지었다. 

호는 해덕(亥德). 돼지 해에 덕 덕. 


호에 돼지가 들어가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하는 우려가 되었다. 하지만 석헌의 해석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해(亥)는 그냥 돼지가 아니라 멧돼지이며 그냥 돼지는 보통 저(猪)를 쓴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Pig가 아니라 Boar로 해덕은 Virtue of Boar. 그리고 멧돼지는 그냥 돼지 이미지와 다른 우직함, 용맹함 등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듣고 보니 사업가 친구의 이미지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카톡으로 친구에게 호를 보내주고 설명을 했다. 이 친구도 처음엔 돼지 해가 들어간다는 것에 갸우뚱했으나 멧돼지의 의미와 이미지를 설명하자, 2,3초 고민 후 바로 OK 했다. 


그렇게 그는 해덕(亥德)이 되었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이 모든 호의 작명자인 석헌은 아무리 생각해도 해덕(亥德)이 최고의 호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아마 이 호로 불리기 시작하면 이 친구의 사업도 엄청나게 대박이 날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에겐 호의 작명값을 받지 않겠지만 해덕에겐 꼭 받아야겠다고 했다. 결국 이 번 겨울방학에 서울에 오면 미국여행 중 우리가 사 간 버번위스키와 같이 먹을 소고기는 해덕이 사기로 했다.


그렇게 현암(玄岩), 벽하(碧河)가 서울에서 출발하여 샌프란에서 석헌(石軒)을 만나 멤피스에 있는 채담(彩潭)을 만나고 돌아오는 로드트립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서울의 해덕(亥德)은 우리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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