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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12. 2024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아빠는 대학 나와서 뭐 하려고 하냐며 돈이나 벌라고 늘 얘기했고 

또한 대학에 들어간다면 한푼의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아르바이트를

 해서 네 힘으로 졸업하라고 고등학교 때 부터 계속 강조했다.

 엄마는 내가 고1 때 치킨, 호프집을 시작 하셨다.

 그 곳에서 장사를 하시다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가게를 더 

확장해 번화가에 다시 호프집을 시작하셨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아예 아빠는 무직이었고 생활비를 갖다 주지 않아 시작한 장사였다. 

다행이도 엄마가 음식 솜씨도 좋으시고 장사 마인드가 있어 가게는

 잘 되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한번 한다면 여장부처럼 밀어 부치는 성격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성격은 아니였다.

 취직과 실직을 반복하는 아빠 때문에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다

 보니 여장부가 된 것이다. 

 난 문구점 및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엄마가 하시는

 가게에서 같이 장사를 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생각이 들어 인건비도 

아낄 겸 엄마 곁에서 일을 도왔다.

 학교 끝나고 바로 가게로 출근해서 새벽 2시에 영업이 종료되면 엄마와 

같이 퇴근하고는 했다. 주말에는 손님들이 많아서 새벽 5시까지 영업했다.

 가게 밖으로 나가면 첫 차 버스가 다닐 정도로 이른 저녁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또한 방학에는 엄마와 가게 문을 같이 따고 영업이 끝나는 새벽까지 

일하고 엄마와 함께 마무리를 하고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그리고 대학교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에는 핸드폰 대신 삐삐가 있었는데 집 전화나 근처

 공중전화로 호출하고 음성 메세지를 남기면 역시 전화로 상대방이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학 동기들이나 고등학교 친구들 혹은 선배님들이 호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 어디를 가자는 내용이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아니면 그날 선약이 있다며 거절하고는 했다.

 나는 그렇게 엄마 가게에서 서빙을 하고 설거지가 넘쳐 흐르면 설거지도 하

는 등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기억이 난다.

 스무살이 된 친구들은 예쁜 옷을 입고 화장도 하며 친구들끼리 명동 등 청춘들이

 몰리는 곳에서 젊음을 만끽할 때 나는 엄마랑 장사를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나이트 클럽 등에서 1차 혹은 1, 2차를 하고 들어 온 사람들이

 많다보니 맨 정신이 아니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어렸을 적 트라우마 때문에 주문 받으러 가기 전부터 

망설이게 되고 어떤 때에는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나이트들이 중년층을 겨냥한 곳이어서 대부분의 손님들이 

30대 후반 혹은 40대에서 어린 내가 서빙을 하니까 반말을 하거나 ‘언니~’ 

라는 호칭을 쓰며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등 질퍽거리는 손님들이 있어서

 처음 응대할 때는 심리적 어려움이 컸다.

 차라리 손님 층이 젊은 세대였다면 덜 힘들었을 것 같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매너 있게 자기네끼리 술자리를 즐겼다. 

 항상 진상 손님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점차 단골도 생기고 우리 가게에 몇 번 온 사람들은 누가 봐도 엄마와

 내가 똑 닮았기 때문에 서빙 하는 나한테 혹시 사장님이 엄마냐고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학생이고 학교 끝나면 엄마 도와 드리러 가게로 와서 

일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나보고 야무지고 똘똘하게 생겼다며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 엄마를 

도와주는 걸 보니 내 딸 같다면서 갈 때 택시 타고 가거나 맛있는 거

 사먹으라는 말씀과 더불어 용돈으로 쓰라며 팁을 주시거나 거스름돈을

 안 받고 가시는 따뜻한 손님들도 많았다.

 돈으로 힐링이 된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을 녹여주는 사람들의 말에 힐링이

 되었고 상처로 인해 응어리지고 얼음이 되어 버린 내 마음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반면 손님들 중에 술 마시면 개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자기네들끼리 싸움이 나면서 술잔과 술병이 날라 다니고

 그러다 기물 파손을 하기도 했다. 

 이럴 경우에는 엄마와 내가 말리는데 말리다 보면 얻어맞기도 했다.

 그리고 기물 파손을 해 놓고 변상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112에 신고를 했고 나는 경찰차를 타고 가서 진술서를

 작성하고 조서를 꾸미고 다시 가게로 와서 장사를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진술서가 뭔지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거의 경찰이 작성한 것처럼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상세하게 진술서를 

작성할 정도로 진상 손님들이 꽤 있었다. 왜냐하면 IMF가 터진 해 였기 

때문에 직장을 잃고 가정이 무너지는 등 사회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술로

 스트레스를 풀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빠 때문에 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데 아줌마 아저씨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술 마시고 싸우면 경찰차를 타고 지구대를 가는 것이 

창피하면서도 싫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어떻게 버텨 왔는데...나도

 다른 집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잘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나도 예쁜 옷 입고 친구들과 떡볶이도 먹으면서 

놀러 다니고 싶어 라는 나의 속마음 까지 전부 쏟아내고 싶었지만 엄마도

 나와 같은 인생을 살았기에 이 말 만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가끔 손님들이 주인에게 시비를 걸거나 갑질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내게

 그러면 그냥 참고 넘어갔지만 엄마에게 욕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평생 아빠한테 폭행당한 엄마를 건드리는 타인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어디서 어린년이 까부냐고 술집 년 주제에 하면서 내 뺨을 후려 

내려 치는 거다.

 아빠로 인해 눈물이 메말라 있던 나였지만 안에서도 맞고 밖에서도 맞는 

내 자신이 불쌍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불안장애 그리고 약간의 우울증 

증세도 있는데 우울증 중에서도 ‘가면 우울증’ 이라고 했다.

 가면 우울증이란 우울한 기분이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이다.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겉으로는 

항상 웃고 있지만, 내면에는 우울함과 무기력감과 같은 불안한 심리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제서야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엄마에게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씩씩한 척을 하고

 엄마를 위로했고, 아빠가 한바탕 한 다음날 어린 남동생이 혹시 상처받지 않았을까 

싶어 같이 놀아주면서 즐거운 듯 웃고 떠들며 놀아줬던 나였다.

 그리고 항상 친구들에게 웃기고 엉뚱하고 밝은 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 어두운 면이 들켜지는 것이 싫어서 특히 엄마와 남동생 앞에서는

 가면을 쓴 채로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무살 청춘을 누리지 못한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20대 초반의 기억은 내가 대학교 졸업할 때 까지 엄마와 장사한 기억이

 전부였다.

 그래도 대학 1, 2학년 때는 아빠가 잠시 술을 끊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비교적 편안할 때였다.

 아빠는 일생 동안 잠시 술을 끊었다가 다시 마시고 또 자제하다가 다시

 마시는 패턴을 반복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는 가끔 큰 판돈을 걸고 도박에 가까운 고스톱을

 치고는 했었다. 다행이 중학교 이후로 한동안 고스톱을 치지 않았었는데

 또 다시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학교에 있는데 엄마가 삐삐로 호출을 해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어제 아빠가 고스톱 판에서 천만원을 빌려서 그 돈을 홀랑 다 잃었다며

 아빠가 빚 갚아야 하니까 당장 천만원을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며 나한테 물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어떻게 하루아침에 도박으로 백만원도 아니고

 천만원을 날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는 쉬지도 않고 돈 벌어보겠다고 뼈가 오도독 소리가 날 때 까지

 계속 일해 오시고 나는 그런 엄마를 도와 가게를 나가서 설거지 하느냐

고 옷이 다 젖는 경우도 많은데 참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우리 한 달 매출이 천만원이라고 하면 비싼 임대료 등을 빼면

 순수익은 400만원에서 450만원이 떨어졌었다.  

 이 돈으로 네 가족이 먹고 사는 것이다.

 물론 그 때 당시 돈으로 400만원이면 큰돈이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었는데 아직 17평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중1이 된 남동생과 방을 같이 쓰는 것이 미안해 집을 

넓혀가기 위해 아빠 몰래 저축을 해 둔 돈이 있었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늦게까지 일하셨고 최대한 생활비를

 아꼈으며 엄마를 위해 돈을 쓴 적이 별로 없으셨다. 만원하는 옷도 몇 번 

생각해서 고르는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의 목표는 여기보다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게 목표였고 두 남매에

게 각자의 방을 주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천만원을 날렸다며 당당하게 천만원을 내 놓으라고 하는

 아빠가 과연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돈을 갚아주지 않으면 잠시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실까 봐 겁이 났던

 우리는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도박 빚을 갚아줬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서 또 엄마한테 천만원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다.

 엄마는 너무 화가 나서 그 큰돈을 그렇게 쉽게 날릴 수 있냐면서 이번에는

 절대로 갚아주지 않을 테니까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아빠도 염치가 없으셨는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도박을 한 내가 미친놈이라

고 당신 고생 하는데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두 번 속는 것도 아니어서 엄마는 아무 말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빠가 돈을 버는 엄마와 나를 믿고 마음 편안하게 쉬고 있는 동안에 엄마와

 나는 점점 지쳐갔다.

 대학 2학년 11월 중순 쯤 이었던 것 같다.

 1학년 때부터 엄마랑 같이 장사를 시작 했으니까 휴일 없이 일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학교를 가려고 지하철을 탔고 앉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서 있었던 것 

까지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기억나는 건 분명 서 있었는데 내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몰려 있었다.

 그 때 당시 몸무게가 38kg으로 많이 마른 편에 속했다.

 몸무게만 적게 나가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약해서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거기에다 아빠가 계속 도박판에 드나들면서 매일 돈을 잃고 일 할 

생각을 하지 않는 아빠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피로가 계속 누적되고 심한 두통과 안면 마비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스트레스에 계속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지하철에서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살짝 눈을 떠 보니 어느 한 60대로 보이는 신사 분이 나를

 엎고 내려서 승강장에 있는 의자에 나를 눕혀 놓으셨고 119에 

신고를 하고 역무원을 불렀었던 것 같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한참 후 눈을 떠 보니 응급실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빈혈수치가 너무 심하다고 했다. ‘10’ 이 

정상이라면 난 ‘5’ 라고 기준의 딱 반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혈 2팩, 다음날도 수혈 2팩을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또한 피로 누적과 체력 미달로 인해 실신한 것 같다고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하니 당분간 쉬는 게 최선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때 장염에 자주 걸렸었다. 

 매일 설사를 하고 구토도 할 때도 있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어지러움 증상이었다. 

 밤에 배가 아파서 일어났는데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방 안의 물건들이 빙빙 돌고 힘이 하나도 없으며 너무 어지러워서

 새벽에 응급실로 갔다.

 장염이 자주 발생하여 여러 검사를 해봤는데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 역시 스트레스로 인한 장염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부정적인 호르몬이 발생하여 여러 기관에 염증을 유발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 중 장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어 염증이 발생하여 장염이 

반복적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첫째 무리하지 않고 둘째로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역시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고 계속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쓰러지기까지 하니까 일단 두 가지 중 하나를 일시적으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학년을 마치고 1년 동안 휴학했다.

 휴학 하고 나서는 엄마와 장사를 하는데 같이 매달렸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어서 과제를 한다던가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일은 없어서 덜 힘들었다. 

 근데 나보다 엄마의 건강이 더 문제였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도 나와 같이 어지러움 증상이 시작되고 그냥 

누워서 안정을 취하면 가라앉는 수준의 경미한 상태가 아니라 

거의 쓰러지기 직전으로 어지러움을 강하게 호소하셨다.

 걷지도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어지러움이 심해지면 

그 때마다 응급실에 실려 가서 안정제 등 수액을 맞고 회복하고

 나서 또 장사를 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생리양이 마치 하혈처럼 쏟아져 산부인과

를 찾았더니 자궁근종이었다.

 크기가 어떠냐에 따라 치료법이 달라지는데 자궁근종은 증상이 없어서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엄마의 경우는 종양이 커질 대로 커져 거대

 종양이었기 때문에 자궁을 들어내는 방법 밖에 없었다.

 엄마는 큰 수술을 앞두고 우울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 이유는 40대 

인데 내 안에 자궁도 없고 폐경이 되어 버리니까 여성성을 잃은 듯 한 느

낌이 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내 나이가 46살인데 만약 이 나이에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하니까 나 역시도 그 때의 엄마처럼 이제

 더 이상 여성이 아닌 듯 한 느낌이 들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상상을 해 보니 그 때 엄마가 얼마나 서글펐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마음을 딸로서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했던 게 죄송하다.

 의사 선생님은 난소에 이상이 있으면 난소도 떼어내야 한다고 했다. 

난소를 떼어내면 계속해서 호르몬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수술이 시작되었다. 원래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2시간이 더 

경과하여 6시간이 걸렸다.

 주치의는 다행히 난소에는 이상이 없어서 자궁만 떼어냈고 호르몬

 약은 복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취가 깨어나자 엄마는 많이 고통스러워 하셨다.

 자궁을 떼어냈으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다른 환자들은 빨리 회복이 돼서 걷기 시작하는데 엄마는 몸이 약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아서 그런지 회복이 늦었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은

 일주일 만에 퇴원을 했는데 엄마는 15일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근데 원래는 의사 선생님이 자궁근종 수술을 하면 아랫배가 뭉친 

거 같아 많이 땡기고 하체에 힘이 잘 가지 않으니 회복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니까 최소 6개월까지는 가벼운 집안일 정도만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쉴 수 없었다.

 15일 동안 가게를 비워둔 것도 병상에서 걱정을 하길래 그게 문제냐며

 엄마 몸이나 더 신경 쓰라고 화를 냈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가게 문을 닫아 버리면 매달 나가는 월세는 어떻게 

해야 하고 생활비를 벌 수 없으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옆에서 병간호를 한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엄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들이 병문안을 오셔서

 ‘현진이 엄마 이제 그만 쉬게 해 줘요. 이런 몸으로 또 어떻게 가게를 해’ 

라고 아빠한테 얘기했더니 

 아빠는

 ‘이제 고생 그만 시켜야죠. 내가 더 힘을 써야 할텐데’ 라는 말과

 함께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 스타일을 안다.

 밖에서는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평판이 좋았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반대가 된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아빠를 안방 호랑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퇴원하고 나서 집에서 하루 정도 쉬고 허리에 복대를 감고

 바로 일을 시작하셨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벼운 집안 일만 하라고 했는데 무거운 것도 들어야 하고 쉬지도 

못하며 일하는 모습을 보고 아빠가 더 많이 원망스러워졌다.

 나한테도 그렇게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지겹게 했고 엄마를 한평생 고생시켰던 아빠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뻔뻔해 보였다.

 밖에서는 좋은 남편인 척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렇게 우리 엄마는 약 1년 동안 허리에 복대를 차고 일을 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고생을 많이 한 엄마가 이제는 

돈 걱정하지 않고 쉬는 것이 소원이다. 지금 69세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일하시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내가 잘 되서 이제 엄마가 더 이상 일하지 않고 집에서 쉬면서

 엄마 친구들처럼 취미 생활도 하고 명품 가방 같은 것도 들고 

다니고 만원짜리 옷 말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내 삶의 목표는 엄마였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엄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열정을 갖고 살아가는 이유는 내게 의지했던

 엄마에게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게 해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옛말에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복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남편 

복이 없었던 엄마에게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게 나와 내 남동생의 

존재 자체가 복 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큰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오직 엄마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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