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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비 Feb 29. 2024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호를 그리는 인생

책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켄 리우

<호>는 사회에서 존재감 없고 보잘것없는 여자가 최초로 영생을 얻은 여자가 되는 과정이 신기하고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제목 그대로 호를 그리는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죽음을 겪은 적 없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첫 번째 삶, 두 번째 삶, 세 번째 삶으로 나누는 것도 좋았다. 죽음이 없어도 우리는 한 시절이 끝났음을 알기 때문이다.


<곁>은 섬뜩하고 슬픈 소설이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의학의 발전이 동반된 고령화 사회에서 '부양'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곁>의 세상에서는 그 부양의 의무를 자식이 아니라 비인간이 대신한다. "당신은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을 상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지 생각한다. 실제론 이미 몇 년 전에 그 사람을 떠나보냈으니까."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카르타고의 장미>는 정말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인데, 싱귤래리티 3부작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슬퍼진다. 어째서 육체를 버리고 영생을 얻을 생각을 했냐면, 내 몸만큼 무겁고 버리고 싶은 게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인간들은 실체를 찾아 다시 우주로 나서지만, 리즈가 어떤 심정으로 몸을 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무거워진다. "몸이 가장 중요한 생존용품"이라던 리즈는, "몸은 결국엔 우리를 버리기 마련"이라며 스스로 몸을 버린다.


<내 어머니의 기억>은 <만조>, <곁>과 마찬가지로 초단편인데, '앞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하는 어머니가 딸의 성장을 보고 싶어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설정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이 시간여행이라는 게 닥터후 마냥 날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김보영의 <미래로 가는 사람들> 같은 시간여행이다. 내 시간을 늦춰서 딸의 더 많은 시간을 볼 수 있게, 광속으로 여행하다 이따금 들러 딸을 보러 온다. 그래서 딸이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를 엄마는 2년 동안 모두 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자기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스물여섯 살인 엄마를 보며 '엄마는 정말 내 삶을 이해할까? 나도 스물여섯 살 때는 꽃 같은 희망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던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딸이라니... 정말 재미있다. 딸은 순식간에 엄마보다 나이를 먹고, 엄마는 딸의 모든 시기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다른 모든 걸 놓치고 만다. 대체 이런 건 어느 정도의 사랑일까.


<사랑의 알고리즘>도 재미있었다. 테드 창의 <0으로 나누면>의 쉬운 버전이라는 느낌이다. 테드 창 헌정소설이라는 느낌도 든다. 테드 창의 <0으로 나누면>이 수학적 진리에 도달해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아버린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켄 리우의 <사랑의 알고리즘>은 모든 상호작용과 애정의 교환이 알고리즘에 기반한 것임을 깨달아버린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진실된 사랑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은 모두 알고리즘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여자에게 신뢰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면에서는 그렉 이건의 <내가 행복한 이유>가 떠오르기도 했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도 정말 재미있었다. 관우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사는 내용인데 유머와 슬픔이 가득하다. 특히 "인생은 모름지기 실험"이라는 말이 좋았다. 켄 리우의 이야기는 이민이나 난민에 대한 것이 제법 되는데 하나같이 슬프고 재미있다.




켄 리우의 단편이 노골적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상 가능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끔찍한 시대라 더 무섭다. 마치 잔인하기 위해 애쓴 적이 없는데도 이런 시대가 도래해 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글쓴이의 말 중 자신이 쓰는 SF는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란 예측이 아니라, 되지 말아야 할 미래를 그린 것이라 한 걸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무섭다...


인적으로 가장 와닿는 건 <곁>이었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곁>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결심하지 않는 것이 결심하는 것과 똑같은가. 짧은 이야기지만 자꾸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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