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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루미 로드에서 만난 GLOOMY relay

멀어졌던 세상과 다시 만나며

by 단풍국 블리야

지난 일 년간 기다려왔던 눈수술을 하게 됐다. 긴장은 됐지만 불편했던 것들로부터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하지만 수술을 하고 나서 찾아든 건 당혹감이었다. 희뿌연 먼지 같은 시야 속에서 보이는 건 어른거리는 형상들 뿐이었다. 수술 후 팔로업에서 아이 닥터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보이지 않는 건가요?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의 반응에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고 회복되면 나아질 거라는 말에 마음을 달래고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내일은 좋아질 거야 라는 희망을 품고 잠이 들고, 소풍날이 온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일어나서 조심스레 사물을 바라보고 탁자에 놓인 책을 펼쳐보지만 어김없는 좌절이었고 매일이 데자뷔 같았다.


세상 모든 것이 내 키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야 존재를 드러냈다. 처방약에 붙은 레이블에 어떤 게 하루 한 번이고 어떤 게 세 번이라 쓰여 있는지, 따끔거리는 눈에 눈썹이 빠진 건지 염증이 올라온 건지, 내가 먹는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 일상을 흔들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발이 걸리고, 유리컵이 손가락에 걸려 날아가 깨지고, 음식이 담긴 그릇을 잡으려다 엎어버리고, 커피를 타려던 잔 입구를 맞추지 못해 커피가루를 쏟아버렸다. 나로부터 멀어진 세상과의 거리에는 절망이 스며들었다.


몇 주가 지나도 똑같은 시야와 종일 흔들리는 눈에 어쩌면 이건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참고 기다려봐 라는 말은 더 이상 효력이 없었다. 절박함으로, 달 후에나 볼 예정이었던, 지난 일 년간 내 눈을 점검하며 수술 준비를 해 준 검안사를 찾아간 후에야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내가 글을 볼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였다. 희망은 회복 불능이라는 절망 속으로 수직 낙하했다.


아이 닥터는 합병증과 재수술의 위험성을 염려했지만 평생 이 눈으로 살 수 없는 나는, 세상과 가까이, 멈춰버린 내 삶을 다시 살고 싶을 뿐이었다. 또다시 수술대에 올라 눈을 부릅뜨고 죽은 듯이 누워있던 그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두렵고 숨이 막혔다.


그렇게 내가 글루미 로드 위에서 여전히 릴레이를 하고 있는 동안, 작년 10월에 시작한 브런치 작가 18인의 연작 에세이 《GLOOMY relay》가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치고 옐로 카펫을 펼쳤다.



우울하고 불안한 시대의 위로, 희망, 극복 그리고 나름의 이야기들


《글루미 릴레이》에 담긴 18편의 글은 내 이야기이자 내 부모의 삶이고 내 친구의 아픔이기도 하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이자 미래일 수도 있는 삶의 단편들이다.

언젠가 이것도 지나갈 거라고 내 마음을 향해 낮게 던지는 주문,

상처 입은 자식을 위해 침묵으로 차려낸 엄마의 밥 한 그릇,

불쑥 찾아온 손녀딸에게 사는 게 고달프냐 묻는 투박한 할머니의 걱정,

그럴 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보내준 다정한 이웃의 미소,

건강하게 돌아오라는 간절한 지인의 기도,

묵묵히 길을 따라나선 친구의 동행이 《글루미 릴레이》다.

마침내 마지막 주자의 손을 떠난 《글루미 릴레이》는 이제 진짜 릴레이를 시작한다.


<글루미 릴레이 로드>
01. 마당_예정옥(오렌)
02. 오늘만 특가 바나나_이미경
03. 당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고통받았던 시간_승하글
04. 아가별이 된 세진이_단풍국 블리야
05. 꿈의 독립_찐파워
06. COCOON_한나
07. 인형수선사_Bono
08. 행복한 꽃_ 오서하(여등)
09. 창 너머 풍경의 속도, 그리고 오래된 무언가_이원희(희원이)
10.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_글방구리
11. 엔딩의 시작_진아
12. 그럼에도 웃을 수 있다면_고운로 그 아이
13. L에게_해조음
14. 완벽한 가면 뒤에_벨라Lee
15.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_발자꾹
16. 방바닥 블루스_선율(포도송이)
17. 감정씨, 나한테 감정 있어요?_이수정(뽀득여사)
18. 신의 옷자락_이원길





두 번의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회복기를 보내며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걱정과 응원 보내주신 브런치 벗님들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아울러, 7개월간 이어진 글루미 릴레이의 완주를 위해 재능과 시간과 열정을 아끼지 않은 오렌(예정옥) 작가님, 이원길 작가님을 비롯한 공저 작가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잊지 못할 행복과 설렘이었습니다.


*책이 단풍국에 이르지 못한 관계로 릴레이에 함께 참여한 오서하(여등) 작가님께서 대문사진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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