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는 가을철마다 호박 축제가 열린다. 크고 작은 가지각색의 호박들이 거리에 주욱 늘어서고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점가들도 호박과 어울릴 만한 음식과 장신구를 판다.
예기치 않게 잔뜩 상기된 기색의 친구가 호박 축제를 같이 가자며 부추겼다. 어린이들을 위해 마련된 사진 명소에서 사진도 찍고 잔뜩 신이 났다. 나도 좀 흥미가 생겨서, 익히면 국숫발처럼 찢어지는 스파게티 스쿼시와 오븐에서 금방 익는다는 호박을 두어 개 더 샀다.
"계속 가을 같았으면 좋겠다." 호박수프를 먹으면서 친구가 말했다.
"가을 좋지. 나도 언젠가 죽는 날을 고를 수 있다면 가을 날씨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마주 앉은 내가 대꾸했다.
"왜? 핼러윈 때문에?" 대화를 가볍게 받으며 친구가 실없이 웃었다.
"아 핼러윈도 있었네. ㅋ 근데 그것보단, 그냥 날씨가 너무 좋잖아. 햇빛은 찬란한 금빛이고, 따뜻하고 아늑한데 추위가 다가오고 있음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그 차분함이 좋아.
겨울이 오기 전에 만물이 찬란하게 빛나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느낌인데, 요란하지 않고, 성급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를 받드는 성숙함 같은 게 느껴져. 죽음이 무섭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 같아. 그래서 뭔가 후회를 남길 것 같지 않은 느낌."
"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잖아. 풍성하고. 난 그래서 호박 축제가 좋은 건데. " 아직도 뜨거운 호박수프를 후후 불면서 친구가 대답했다. 나무로 만든 일회용 재질의 가벼운 숟가락이 고작 입김에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친구가 말을 이어갔다. "한 해 농사를 마친 보상받을 시간이잖아. 그 기쁨이 가장 커야 할 타이밍에 죽음을 생각하다니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데. "
그런가.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쥐고 있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페더바이서의 달콤한 맛이 탄산과 함께 혀 위에서 혀 밑으로 흘러 들어갔다. 따끔따끔하다.
다른 한 손에는 조금 전 산 호박이 담겨있는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다. 혹시나 호박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까 봐 봉투 손잡이는 여전히 쥐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왁왁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순간 나는 책임져야 할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느낀다.
"있잖아, 좀 무겁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 사실 어렸을 때 낙태를 한 적이 있어. 한국에서 막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 오래 만난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잖아.
엄청 일찍 발견해서 의사도 흔치 않은 경우라 했어. 겨우 임신 4주 차에 들어서는데 몸이 벌써 반응했거든. 벌써 입덧이 심해서 계속 토하고. 가슴도 부풀어 오르고. 그래서 테스트기를 써봤더니 양성인 거야. 그땐 딱히 갈 데가 없어서, 맥도날드 화장실에서 테스트했어."
진지한 눈빛으로 바뀐 친구가 조용히 끄덕인다. 다정함이다. 더 말해도 될것 같은 용기가 났다.
"무서웠고, 기겁했고, 현실 같지 않았어. 모성 같은 거 느껴지지도 않더라고. 외계생명체 나오는 영화 보면 가끔 징그러운 생명체가 사람 몸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잖아. 비약도 있겠지만 좀 그런 느낌이었어. 내가 원치 않는 생명이 내 몸에 자리했음을 상상하는 건.
아무튼 어린 나이였고, 이제 막 대학을 시작한 시점이었고, 그래선지 임신을 알린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 엄마도, 남자 친구도. 조용히 병원에서 중절 수술을 했지.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합의한 듯 잘한 결정이라고 말해줬어. 사실 나도, 아직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원치 않은 아이를 준비되지 않은 부모가 불행의 원인으로 여기며 키우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거든.
내 주변에는 몇 명이나, 부모도 자격 증명을 해야 한다고 믿는 친구들이 많으니까. 그런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친구가 슬쩍 웃는다. 그래 이 친구와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너무 다정하게 들어줘서,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임신이라는 단어는 축복보다는 일어나면 안 될 무서운 사건으로 생각해 왔어. 다행히 다시 일어나진 않았지만, 타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위치라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아.
결혼하고, 지금 남편이 너무 좋으니까 남편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더라. 나이 40이 가까워져 오고 있고, 우린 전혀 준비되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래서 가끔 생각하게 됐어.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혹시 나의 유전자 어딘가에 각인 된 망령 같은 것인가 하고. 지금 아이가 자연스럽게 생긴다면 그것대로 기쁜 일이겠지만 나랑 남편은 아마 영영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은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느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 되겠지. 여기선 입양도 부부 나이의 합이 80보다 적어야 하니까.
내 주변엔 아이 없이 사는 부부도 많고, 자기는 한 번도 아이를 원한 적 없었다고 말하는 여자 작가도 많아. 근데 나는 그렇게 줏대 있는 인간은 아니라서,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 될 거야. 아마 종종 외롭거나 후회스러운 순간도 찾아오겠지. 남편과 나 둘 중 하나가 먼저 죽는다면 함께 기억해 줄 아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할 날도 분명히 올 거로 생각해.
그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진실이야. 100퍼센트 후회하지 않는 삶 같은 건 없다는 거. "
오랜시간동안 생각해 왔던 말들을 쏟아내고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내 시선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비닐봉지에, 그 안에서 덜걱거리는 호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친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호박에 하는 말 같았다. 몸속 가득 씨앗을 품고 있는 호박에.
매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은 호박처럼 아름답겠지. 하지만 아주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은 욕심이다. 어떠한 선택에도 약간의 후회는 따라올 수 있다. 씨앗처럼 여문 단단한 후회를 품는 것이 인생일 거라고 축제를 떠나며 생각했다. 가을의 정점에서,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