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먹지는 않지만 마트에서 가끔 찾게 되는 갈리아라는 종류의 멜론은 독일 슈퍼마켓에서는 거의 사시사철 흔히 보이는 과일이다. 멜론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것, 심지어 멜론 색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옅은 초록색의 두꺼운 껍질이 까끌하고 그물 같은 하얀 선의 무늬가 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막상 잘라보면 무른 저녁노을 주황빛의 과육이 언제 먹어도 향기로워서 대단한 사치를 부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멜론 씨앗은 냄새도 촉감도 달큰한 끈적한 점액에 덮여있다. 이대로 오래 두면 벌레가 꼬일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어느 여름날 밤 저녁식사 후 싱크대에 남아있는 여러 씨앗들을 수집한 계기가 되었다.
미끄덩 거리는 씨앗을 집어내려고 멜론 속을 이리저리 파헤치는 내 손가락들이 차갑고 축축하고 끈적했다. 그리고 당연히, 달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온몸이 손가락에 연결되어 있음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져 황급한 죄책감 같은 것이 마음에 드리웠다. 과일이란 이렇게 간단히 감각적 에로스를 불러낼 수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어떤 영화에서 십 대 주인공이 성에 대한 호기심을 과일에 투사하는 장면도 봤던 것 같다. 휴지로 손가락의 과즙을 굳이 닦아 내고 나서야 뭔가 마음이 놓인다. 손이 말끔해져서인지, 손을 닦음 으로써 이것이 성적유희 같은 게 아님을 기어코 스스로에게 증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인지는 알지 못한다.
노란 파프리카 씨앗은 꼭지 밑 둥을 중심으로 빽빽이 매달려있는데 비교적 얇고 둥글어 마치 작은 동전들이 저금되어 있는 모양새다. 손에 닿은 씨앗이 콩깍지처럼 살짝 마른듯한 감촉이라 이걸 또 열어 그 안에 훨씬 작은 씨앗을 꺼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씨방에서 씨앗들을 따닥따닥 뜯어내는 것이 버블랩 뽁뽁이 터뜨리는 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파프리카는 8개월은 자라야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고추 종류가 으레 그렇듯 병충해에도 약해서 가정에서 수확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재미로 키워보는 게 나을 거라 한다. 마트에서 사 온 채소에서 씨앗을 받아 자급자족의 꿈을 이룰 것처럼 들떴던 마음이 좀 가라앉고 말았다.
역시 힘들려나. 핀셋을 찾아 무화과 씨앗을 발라내며 생각을 더해간다. 그러고 보니 참외 심을 곳도 없는데 멜론은 어디서 키우지, 무화과는 나무가 되던데. 이 씨앗들이 다 발아가 될 지도 알 수 없지만 돼도 문제겠다. 좁쌀 보다도 작은 무화과 씨앗에는 붉은 과육이 잔뜩 묻어있어서 언뜻 보면 씨앗인 지 조차 알 수 없게 지저분했다. 누군가 손님이라도 왔다면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한 땀 한 땀 수확해 낸 씨앗들은 핀셋에 쉽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아서 한 곳에 모으기가 힘들었다. 핀셋에 묻은 씨앗을 손으로 떼어주면 이번에는 거추장스럽게도 손에 달라붙어 버린다.
이렇게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된다니 믿을 수 없네. 다소 뻔한 생각이 말라붙은 과즙처럼 지겨워졌다. 과연 이 씨앗들을 다 심을 수나 있을까 하는 허망함이 이미 싹터 버렸음을 느낌과 동시에 이미 한 시간가량 하고 있던 일을 그만 두기는 싫은 고집이 올라온다. 모은 무화과 씨앗들을 작은 물컵에 넣고 돌돌돌돌 젓가락으로 휘저어준다. 마치 초소형 버전의 세탁기처럼 소용돌이가 생기고 씨앗들이 춤을 춘다. 소용돌이가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 물 위에 뜨는 씨앗과 가라앉는 씨앗의 구분이 생긴다. 건강하고 좋은 씨앗을 심기 위해서 떠오르는 씨앗들은 건져내 버린다.
다른 씨앗들도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돌돌돌돌, 작은 씨앗, 돌돌돌돌, 가벼운 소용돌이.
돌돌돌돌, 큰 씨앗, 돌돌돌돌, 무거운 소용돌이.
다른 것은 씨앗뿐인데 회전하는 물의 질감마저 달리 느껴진다. 가는 체로 씨앗들을 걸러내고 잘 마를 수 있도록 종이 위에 널어본다. 양이 상당해서 금방 아연해졌다. 대충 세어봐도 종류별로 100개는 훌쩍 넘는다. 이게 열매 하나에서 나온 씨앗이라고. 이렇게 많은 씨앗을 매번 버리고 있었구나. 이 씨앗들은 다 쓰레기장으로 가서 소각되는 걸까, 만약 전부 심을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무화과 가지가 구불구불 그늘을 드리우는 숲을 상상해 본다. 노란 파프리카가 주렁주렁 달린 덤불이 줄 지어 서고 짙은 초록빛 잎사귀가 무성하게 얽힌 멜론 덩굴이 곳곳에 자라겠지. 그런 숲에서 숨을 쉴 수 있다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나의 어떤 생각들은 끝까지 자라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했고 대부분의 생각들은 의식도 못한 채 잡초처럼 났다 사라졌다. 물 위에 떠오른 쭉정이 씨앗을 걸러내는 것처럼 나도 내 생각을 고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끈적하고 난잡하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런 뒤섞임도 말끔히 씻어내고 햇볕에 바삭하고 단단하게 말려주는 거다. 언젠가 싹 틔울 날을 위해 종이봉투에 소분하고 날짜를 써서 그늘진 찬장 속 깊숙이 넣어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