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래김무침
파래는 썼고 김은 고소했다.
파래는 어른의 음식과도 같아 무, 부추, 파 그리고 약간의 고추 같은 것이 양념으로 같이 조리되었고, 김은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아이들이 간식으로도 집어먹기 좋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파래김무침은 어른의 음식이기고 하고 아이들의 음식이기도 하니 밥상에 올라오면 모두가 다 먹었어야 하는데, 여전히 그 반찬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어른들의 입맛에 가깝다.
"나는 크면 절대로 고향 근처도 안 갈 거야, 바닷바람 징글징글하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 나는 놀러라도 이곳은 절대 안 올 거야." 이게 고향을 떠난 후 엄마와 함께 종종 했던 이야기다. 우리는 작은 텃밭을 일구고 오리나 닭과 같은 몇 종류의 가축을 키우며 동네 사람들과 가끔 맛난 음식 해 먹으면서 고스톱이나 치는 "시골"에서의 삶을 이야기했지만, 엄마와 내가 말하는 "시골"은 우리가 시간을 보내왔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고향도 푸른 바다가 있고, 아름다운 텃밭들이 있으며 친구도 되었다가 음식이 되기도 한 가축이 있었고, 밥을 해 나눠먹기도 한 이웃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고향, 그 시골에는 "생계"가 있었다.
작은 배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보이는 김 양식장, 멀리서 보면 푸르디푸른 바다 한편에 검은 파도가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투명한 파란색과 짙은 검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퍼즐 같기도 했던 것. 우리 집은 그것의 일부도 소유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김을 길러 수확하고 팔았던 기억은 없고, 누군가가 일궈온 김을 엄마가 가서 인부로 같이 일하며 씻고 익히고 말리고 거둬들이는 일을 도왔던 것 같다. 반면, 집에서 걸어 조금만 나가면 바닷가 주인 없는 바위에 붙어 있는 청명한 초록색의 파래, 맑은 바닷물과 어우러져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가을길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같은 모습으로 보드라움이 느껴지는 촉감, 아마도 차갑디 차가운 물에 엄마는 손을 넣어 반찬으로 만들 만큼 등을 숙여 뜯어와 요리했겠지.
멀리서 보면 한없이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가까이 볼 수록 고통스러운 게 있다. 대부분 그것들은 생계와 연결이 되어 있고, 그 결핍의 정도에 따라 고통은 더 깊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 듯하다. 엄마의 간접 노동과 맞닿아있던 김은 내게는 덜 고통스러워서 고소했고, 파래는 엄마의 직접적 고통이 느껴져 쓰게 느껴졌던 것일까. 김을 얻기 위한 노동은 선택이었고, 파래를 얻기 위한 노동을 필수였기 때문에 그 둘의 맛이 달리 느껴졌던 것일까.
파래무침을 보면 그저 젓가락이 쉽게 가지 음식으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가만히 보다 맛을 보니 그 씁쓸한 맛에서 오래전 고향에서 맡던 바닷바람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함께 긴 노동에서 이제 돌아와 분주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엄마의 몸에서 났던 바닷물이 말라 눅눅히 풍기던 소금기 가득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엄마가 있었더라면, 엄마와 함께한 식사였더라면 우리는 김파래 무침을 먹으며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우리의 추억이 파랗게 맑았었지만 쓰디썼다고 했을까, 아니면 검디 검었지만 고소한 시간이었다고 했을까. 그리고 절대 가기 싫다고 했던 그 고향을 김파래 무침으로 보며 그리워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기억하고 싶지도 되돌아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 이야기했을까.
우리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대화를 이끌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