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에서 우는 괴리, 그 마음의 고통
나는 포항에서 5살부터 25살까지 총 20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중 절반은 흥해읍이라는 포항 안에서도 조금 더 시골에 가까운 지역에서, 그다음은 환여동이라는 곳에서 고등학교를, 그 이후에는 환여동에서 가까운 양덕동이라는 곳에서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내가 살았던 곳에서 그나마 '학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아마 중학교 때 다닌 환여여중 1년일 것이다.
내가 아는 그 누구도 미국에 나가서 사는 삶을 꿈꾸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미국에 나가는 꿈을 꾸게 된 것은 내가 흥해중학교에 다닐 적에 책을 읽었기 때문인데, 책을 읽은 이유도 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서 책 읽는 것이 내 마음이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유학 간 사람들의 스토리를 읽으며 한국을 떠나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행복해질 수 있을지를 상상하며 설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유학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비록 내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미국에 살지도, 박사 학위를 받지도 않았지만, 어쩌면 나는 한국을 떠날 것이고 미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나의 그런 생각에는 자식이 학업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했던 어머니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학을 하고 박사 학위를 받으면,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것이라고 믿었기에 불확실한 유학길을 오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전혀 현실적으로 사고하지 않은 채로 미국에 왔고, 그랬기에 졸업할 수 있었다.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한다는 그 어떤 가능성도 열어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졸업식 날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게 정말 확실히 깨달아지며 그 우울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나는 나였고, 6년의 박사 과정 동안 내가 얻은 지식과 기술 이외에는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그 지식과 기술의 가치를 헤아리기에는 나의 기대치가 너무나 높았고, 나의 현실은 졸업장 한 장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없었다.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고통스러운 박사 유학 과정을 꾹꾹 참아온 것에 대한 변화라기엔 그 변화가 미약하다고 느껴졌다. 여전히 나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스웨터를 입고, 마음에 들었음에도 가격을 지불할 여유가 없어 고이 싸서 반품을 하며, 마음에 꼭 드는 식탁은커녕 적당한 식탁도 찾지 못해 씁쓸한 마음을 스스로 토닥여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공부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정말 보람되고 의미를 느끼지만, 박사 학위를 받고 기대했던 삶과 현실이 너무 달라 씁쓸한 하루이다. 박사 졸업이 새로운 시작임을 나는 몰랐고 지금 살로 뼈로 느끼고 있다. 이 깊은 부조리감에서 오는 우울감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다시 내 마음속의 괴리를 채워가기 위해 초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나를 다시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