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함께 그리고 실패와 5년여를 보냈다. 후에 듣기로 입사 때 내 모습을 본 나보다 여섯 살 어린 입사 동기는 내가 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먼 데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산속에서 온 사람 같다고 했다. 남들이 호봉과 경력을 쌓으며 시간을 돈으로 바꿀 때, 집을 사고 차를 사며 사회의 일원이 돼 가는 동안 동안 나는 정말로 산속에 꽁꽁 숨어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면접 보자고 입은 정장 맞춤새나 구두까지 뭐 하나 맞춤인 게 없고 촌스럽거나 어설펐다. 공부를 오래 했으니 트레이닝복만 쌓이고 정작은 학부 때 산 게 전부니 겉으로나 속으로 내 시간은 그대로 멈춰 있었던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까 싶던 경기도였다. 족히 200명은 넘는 인원이 필기시험에 나선 꼴을 보니 서울 돌아가자면 버스 잡기가 만만치 않을 듯해 시험이 끝나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필기 후에 강남역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한 까닭이다. 나는 그녀에게 맛있는 걸 먹이자고 그간의 공부를 포기했다. 밥을 먹여야 한다. 그때 그녀와 나는 딘타이펑에서 딤섬을 먹었다. 당시 입사 필기시험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객관식 경제상식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 논술이었다. 경제 상식은 한국경제신문인가 뭔가 어느 사이트에 있는 단어들을 외우는 걸로 대체했고 논술이야 얼버무리면 되겠다 싶었다. 논술 문제는 한중 FTA와 중소기업의 관계 그런 주제였다. 전년도 로스쿨 면접서 중요하지만 놓쳤다고 생각해 법조인이 내 길이 아니구나란 걸 느끼게 했던 문제가 한중 FTA와 법률시장에 관한 내용. 준비 부족으로 떨어질 걸 알면서 돌아오는 길에 찾아봤던 주제였다. 이 회사가 나를 붙이려나보다 싶었다.
곧이어 면접시험 일정을 통보받고 여러 장의 영어 스크립트를 외웠다. 말이야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떠들 자신이 있다. 영어는 그만한 수준이 못 되는 걸 알았다. 나는 욕실에 누워서도 유학파였던 여자친구가 만들어줬던 우아한 문장들을 외웠다. 내 친구 준민이는 스크립트를 비웃으며 비웃으며 네가 가능한 수준으로 고치라는 조언을 했다. 다대다 면접과 영어면접이 함께 있었는데 해외 경험이 없던 내게 외국인과의 대화는 영어로 진행했던 마케팅 수업과 영어 회화 과제로 친구가 도와줘 만났던 덴마크인 아네트와의 만남 이후로 처음이었다. 영어 면접관은, 엉성하지만 적극적이던 내게 퍽 나쁘지 않은 평가를 준 모양이었다. 다대다면접에선 김성원 씨는 이제 좀 자제하시라는 얘길 들었다.
수차례 최종면접을 봤고 셀 수 없는 서류와 면접 탈락을 경험했다. 게다가 나는 전직 검사와 판사가 앞에 있는 로스쿨 면접을 본 사람 아니던가. 합격문자가 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엄마와 애인에게 문자를 전송했을 것이다. 합격 발표가 나고 신체검사에 범죄기록 증명 등을 분주하게 뗐다. 서류를 제출하러 회사에 갔다가 작성한 그로계약서. 내 밥벌이를 시작하게 해 준 그 문자는 지금 어디 있는지, 근로계약서 또 어디 있는지. 돈을 벌어야 했고 그래서 무엇이든 던졌던 서른두 살, 지금 나이론 만 꽉 찬 서른한 살이 되던 그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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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일은 3월 2일. 지금은 직원이 너무 많아 공동행사장으로 쓰지 못하는 4층 교육실에서 월례 조회를 하면서 정규직 공채 직원들이 첫인사를 했다. 100여 명 직원들 앞에서 한 마디씩 인사말씀을 했고 사령장을 들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어떤 사람들은 반겼고 어떤 사람은 떨떠름해했다. 신입들이 발령될 부서의 팀장들과 기본적인 업무 사항을 안내해 주기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이어졌다. 후에 본부장으로 은퇴한 어느 부서장은 내게 밥을 일찍 먹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했고 공무원 출신 어느 본부장은 우리 회사가 여성들에게 최적화돼 있는 기관이라도 했다. 어느 팀장은 민간 경험을 빗대면서 이만한 회사가 없다고 했고 당시 보직을 놓았던 그리고 나와 오래 일하게 되는 당시 어느 실무자는 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회사라는 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일주일간 여러 부서장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는 일하기 위해 모인 곳이라는 말들, 우리 갑인 공무원들이 멍청하니 적당히 이해하고 살자 이런 말들이 기억에 남는 내용들이다.
첫 주 어느 날은 기획실이 주관해 신입직원들과 당시 대표와 저녁을 먹었다. 내가 제일 형이고 제일 생일이 빠른데, 자꾸 뭐가 틀렸던 모양. 기록이 누락됐다는 건 뒤에 알았다. 고졸 출신에 농협 부회장까지 가신 당시 대표는 우리가 입사 동기다, 사회생활은 네덕 내 탓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고 반복했다. 실제로 네 덕 내 탓은 직장생활의 중요한 태도다. 그리고 대부분은 갖지 못하는 태도다. 2차까지 마치고 술에 취해 집에 가던 길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금요일인지 월요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는 이제 어른들의 세상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제 직장생활이란 걸 하게 됐다는 걸 비로소 느끼게 됐다는 거다.
인권변호사가 돼 내가 사람들에게 받은 도움을 나눠주겠다는 둥, 자기소개서에 쓰는 멋들어진 말들 따위는 이제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실패했으니까. 나는 그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만큼 대단한 삶을 살 그런 운명의 존재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많고 많은 노동자들처럼 이름 없이 조용하게 세상에 동화돼야지. 내가 가진 사소한 사연, 비극적 서사 따위 전부 없는 걸로 치고 살아야 한다. 더는 이 세상에 우연히 도착한 여행자처럼, 끝없이 세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인식하면서 잘못된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상상, 보통 사람들의 연약한 삶들에 작은 기여라도 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따위 망상 같은 말을 떠들지 않겠다. 나는 그런 다짐을 했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알리바이일 뿐이야. 내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가 세상과 불화하는 까닭에 만들어낸 말장난일 뿐이라고. 그렇게 믿기로 하고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실패자였고 그래서 나의 신념의 말들은 그저 말들일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애인에게 맛있는 밥을 사 먹이고 엄마와 아버지에게 사람구실하는 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내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passenger - iggy pop
https://youtu.be/-fWw7FE9tTo?si=6QYq7Feh4PZ8EJ36
트레인스포팅의 OST로 유명한 이기팝의 노래다. 유명한 앨범에 Lust for life에 수록돼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톤 기타로 무심하게 긁는게, 그야말로 길가에 놓여진 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90년대 영국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 이기팝 선생은 좀 멀지만 경쾌하고도 냉소적이고도 우울한 이 곡은 분명히 특별한
대부분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오늘을 던져진다. 실존주의니 포스터 모던 철학이니 하는 것들을 공부할때 '던져진 존재' 라고 인간을 설명하는 걸 봤는데 던진다는 건 그래도 누군가의 의도가 포함돼 있다.
우리는 우연히 이곳에 왔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도착한 곳에서 부터 출발한다.
재무적 이익일 수도 있고 어떤 정치적 지위일 수도 있다. 우린 모두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주에에 인생에 답이라도 있다는 듯이 동서남북으로 달려간다.
내 직장생활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게 주어진 목적과 꿈을 모조리 포기한 선택이었다.
내가 되고자 했던 삶의 모습들은 애초에 경로에 돌입조차 못하고 무너졌다.
멋진 말들은 자기소개서에서나 유효하다. 한 인간을 증명하는 것은 그 사람이 버텨낸 고통의 총량인 법이다.
내게 회사는 세상에서 처음 다른 사람의 의지로 출발하는 기차에 탄 승객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자,
더는 내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자기 인식의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