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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star Aug 11. 2024

0.4.1.  공공기관의 1년(1)

정산과 사업계획

첫해를 지나는 동안 벼라별 제출 자료 들에 놀라고 도무지 이런 것들을 수년동안 했을 텐데 누구도 사전에 대비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모습에 더 놀랐습니다. 심지어 첫 팀의 이른바 '차석'은 회사의 전체 일정을 관리하는 기획실에 꽤 오래 있었음에도 업무를 위해 어떤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는 둥의 내용들에 대해서 별다른 리더십을 보이지 않았어요. 후에 알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이유와 조직문화 두 가지가 결합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매우 많았고 겉으로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적극적으로 교통정리를 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 내가 입사했을 때까지만 해도 일을 만들어서 하는 사람을 퍽 좋아하지 않았어요. 누군가 달리면 옆에 있는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무능과 게으름이 들킬까 봐 달리는 사람을 씹어대기 일쑤였거든요. 그러니 품을 들여 먼저 업무를 준비하고 일정을 관리하는 일 따윈 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나는 2년쯤의 회사 업무를 본 후 그 이후로 들어온 후배들에겐 1년간 회사가 돌아가는 전형적인 절차들을 정리해서 알려줬어요. 물론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죠. 나한테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어떤 단어들의 일부라도 후배들 머릿속에 남아서 업무를 둘러싼 환경 들을 조금 이해하는 속도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들보다 몇 가지 중요한 단어들을 엮어서 인식의 체계에 넣어준다. 그게 내가 목표한 바였습니다.


1. 정산과 결과보고 

1월이 되면 전년도 사업 정산과 세부사업계획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일하기 싫어서인 이유로 전년도 사업을 이월시켜서 작년 예산을 올해 써야 하는 경우까지 있다면 1월은 더욱 분주합니다. 전년도 사업 결과보고 작성이 연말에 끝나지 않은 경우라면 더 난리죠. 게다가 부서 성과보고서까지 작성해야 하면 일이 더 늘어나요. 나는 늘 1월이 무척 바빴습니다. 특히 퇴사 직전 3년에 맡은 사업은 작은 보고서들이 넘어와야 세부결과보고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했죠. 1월 한 달간은 보통 100시간 이상 야근을 해야 했습니다. 뭐 더 어릴 땐 그보다 많이 하는 게 다반사였지만. 


전년도 사업을 마무리하는 정산을 위해 사업 결과보고를 쓰는 게 시급한 일입니다. 전임 담당자들이 30p 내외로 만들어놨지만 나는 보고서를 늘 세 가지 이유로 썼기 때문에 볼륨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보고서를 쓰는 이유는 후에 밝히겠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전제 하에서, 1) 내가 다시 보기 위해 2) 윗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3) 다음에 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였습니다. 공공기관은 모든 문서를 전자화해 유통시키고 또 공유하도록 돼 있거든요. 그렇게 쓴 보고서가 100p를 넘어갔어요. 100p가 넘는 보고서를 쓰자면 사전 준비가 다 돼있어도 순수하게 작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10일 정도가 필요합니다. 전년도 말에는 결과보고에 들어갈 내용들을 정리하고 보고서 전체의 얼개를 짜고 신년에 되면 이제 보고서를 작성하는 거죠.


그러는 사이 파트원들은 예산을 챙깁니다. 출장비니 회의비 같은 운영비가 가장 지저분해요. 해외 송금 나가는 내용들도 있어서 회계부서와 정리도 해야 하고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모두 다루는 데다, 상급기관에서 주는 세입 말고 기업들로부터 받는 세입까지 관리해야 해 예산 항목이 꽤 길어 엑셀로 300행 정도가 됐습니다. 물론 항목만요. 실제 집행 기록은 3,000행 정도가 됐어요. 그걸 일일이 세금계산서, 법인카드 영수증 같은 적격 증빙과 결과보고, 상담 일지 같은 증빙을 맞춰봐야 해요. 그리고 그걸 세트로 만들어서 책자로 출력합니다. 세트로 만드는 것도 일입니다. 집행항목별로 어느 문서를 전제로 기안을 했고 결과 보고는 뭐였고, 증빙은 뭐였는지 폴더를 전부 만듭니다. 늘 이때 가장 바쁜 출력 업체에게 외장하드 또는 USB를 넘기면 이틀쯤 후에 책자가 옵니다. 출력비만 100만 원이 넘게 나올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렇게 출력하면 증빙책자가 양면 인쇄 2,000p 짜리 책자 10권쯤이 나옵니다. 전년도에 쓴 20억 쯤 되는 예산을 이렇게 집행했습니다 인 거죠. 


내가 쓴 1oop 넘는 결과보고와 20,000p 쯤 되는 증빙을 묶어 직장인의 자가용인 끌차(전문용어로 구루마라고 하죠)에 실어 차에 태우고 손수 상급기관에 배달합니다. 공무원들은 질려하면서도 좋아해요. 그게 다 자기들이 한 일이거든요. 내가 쓴 보고서는 군데군데 잘라서 붙여넣기만 하면 되거든요. 공무원들은 우리 같은 산하기관에 우리처럼 일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죠. 그걸 다 보는 경우는 감사로 공격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가 보통이고 아예 안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000 과장이면 굳이 안 봐도 되죠 뭐. 우리끼린 그런 걸 신뢰라고 합니다.


*잠시 언급된 평가 얘기는 다른 데서 다루겠습니다. 


2. 사업계획.

올해 예산은 전년도 6월~7월부터 얘기가 됩니다. 중앙부처부터 각급 광역, 기초 지자체가 갖고 있는 법률 및 각조 규정과 지침을 근거로 삼는다는데 그런 것들은 대부분은 공무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쓰이고 산하 기관을 공격하는데 쓰입니다. 전년도에 급하게 만든 1장짜리로 만든 사업 계획, 신규사업 계획 들이 예산과 를 돌아 의회 의결을 지나 예산으로 확정되는 게 12월, 그렇게 정해진 예산이 다시 기관 예산에 올라타는 게 통상 2월 이사회 때입니다. 저는 밥 먹다 일찍 들어왔는데 본부장이 신규사업 없냐고 해서 5분 만에  급하게 한 장짜리 만들어 보낸 적도 몇 차례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공공제도들은 모든 것이 위계화 돼 있어요. 우리 법 체계가 헌법, 실정법, 시행령, 조례 순으로 위계가 있는 것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의사결정 체계와 순서에 따라 의회 의결에 따른 예산 확정, 이어서 우리 같은 기관의 이사회의 의결로 기관 내 예산 체계가 확정되는 거죠. 기관 이사회에서 뭔가 바뀔 가능성은 없어요. 대부분 그저 의회 의결의 거수기일 뿐입니다. 의회에서 예산이 확정되면 이제 우리는 사업 계획을 준비하죠.


정산이 끝나 한숨 돌리나 싶은 사람도 있지만 저는 바로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계획의 결재를 받아야 진짜로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시어머니들도 많습니다. 기관장 결재만 받아서 될 게 아니에요. 상급기관 공무원과도 동의가 돼야 하죠. 공무원들의 반응은 대부분 네들 알아서 해라 인데 가끔 정신 나간 관리자가 끼면 일이 틀어집니다. 이런 사업 하나까지도 자기 승진의 도구로 삼고 의회 눈치를 보는 과장이나 사무관 하나가 끼면, 혹은 실국장 오더가 엮이기 시작하면 그쪽에서 결재가 안 나요. 그쪽에서 세부계획을 승인해주지 않으면 내부 결재는 올리지도 못합니다. '신뢰'가 없으면 또 들어갑니다. 요새는 청탁금지법으로 그런 게 사라졌지만 예전엔 또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사업계획 승인 해주세요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산을 주고 일은 우리가 하는데, 사업계획 하게 해 주세요라고 절을 해야 한다니. 오히려 그쪽에서 잘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게 맞는데 말이죠. 실제로 정신병자 같은 과장 하나 때문에 모든 사업계획이 7월까지 딜레이 됐던 사례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산하기관뿐 아니라 해당 과의 팀장 주무관들도 죽어났다는 후문, 그들도 어떤 결재도 올리지 않았다는 후문과 함께. 


사업계획 작성은 즐거운 일입니다. 대략 20개 남짓한 논문과 KDI, 한국은행, 한국무역협회, 필요하면 IMF나 OECD 보고서도 출력해서 읽습니다. 띠지를 붙이고 써먹을 걸 체크해요. 영감을 주는 건 논문이지만 신뢰성을 주는 건 기관들의 보고서입니다. 출처를 KDI나 IMF로 밝히면 내용도 그럴싸해 보이거든요. 전년대비 GDP 상승률 예측이 어쩌고, 주요 산업 전망 중 소비재가 어쩌고 등등. 그런 내용들이 사업 배경에 쓰이고 방향설정을 위한 재료로 들어갑니다. 그밖에 기관장의 요구, 공무원의 요구, 본부장이나 팀장 등 우리 측 관리자의 요구, 같이 했던 팀원들과 파트너들의 요청, 담당자로써 내 의지 같은 것들이 내용의 구체성을 채우는 것들입니다. 계획은 그저 보고서가 아녜요. 그것들을 실제로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을 타진해 보는 것도 준비해야 할 내용입니다. 다른 부서와 협업은 가능한지, 다른 부서에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것 중 협업이 가능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등. 그렇게 초안을 쓰면서 파트원들과 회의를 합니다. 그럼 각 파트별로 이건 목표치가 과하다, 이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 는 둥. 나는 이렇게 풀어가면 어떻겠느냐, 이건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 등등. 더러는 내가 물러서고 종종은 후배들이 물러섭니다.


그렇게 초안이 정비되면 이번에 팀장에게 갑니다. 팀장은 다시 방향제시를 합니다. 이거 가능하겠어? 이거 어느 쪽 사람들 접촉해 봤어? 이건 상황이 어때. 올해는 한번 해볼라고요, 만나 봤는데 트라이는 한번 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팀장이 제시한 방향, 만나보라고 한 사람들과의 접촉까지 하고 나면 이제 본부장 보고를 들어갑니다. 다 같이 한 거니까 팀장에게 컨펌을 받고 파트원들과 본부장실에 들어가죠. 큰 사업을 맡았을 때 얘깁니다. 작은 사업은 대부분 팀장 선에서 끝나요. 본부장은 내가 제시한 방향과 사유, 각각의 파트원들의 역할과 기여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두 가지 정도 제안을 주거나 보고서의 첫 페이지, 기관장이 읽을 첫 페이지에 대한 코멘트 정도를 합니다. 이제 이 모든 걸 담아 보고서를 꾸밉니다. 마지막으로 파트원들에게 공유하고 결재를 태웁니다. 거의 열두세 명까지 결재를 타는 문서는 아무리 빨라도 하루 안에는 결재가 나지 않아요. 다들 출장에 미팅에 약속에 바쁘신 분들이라서. 간혹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고  전화가 오거나 감사 규정에 맞지 않거나 자기네 부서 협조사항이 이해가 안 된다고 전화가 오기도 합니다. 필요하면 문서를 회수해서 자구를 고치거나 내용을 수정합니다. 


간혹 직접 보고 받길 원하는 기관장에게는 결재 태우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구두 보고를 들어갑니다. 두꺼운 백자료와 근거들을 준비하고 기관장 보고니 겉에 '가다마이'라도 걸쳐야죠. 저처럼 팀장 코 앞까지 갔던 담당자는 팀장과 함께 기관장에게 직접 보고를 합니다. 게다가 나는 노조위원장을 했던 터라 종종 부서장이 일부러 앞세우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실무자라지만 노조위원장을 깨는 기관장은 없거든요. 기관장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실무자로서 어떻게 현실화할지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난해에는 정말이지 과하게 일을 했어요. 그런 갈굼과 내용파악의 보고가 끝나면 기관장의 오더가 떨어집니다. 


"결재 올려"


이렇게 힘들게 힘들게 결재를 타면 이제야 말로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기관장이 일을 하라고 허락하는 '결재'가 떨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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