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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star Aug 13. 2024

0.4.2. 공공기관의 1년(2)

행정사무감사의 예고편 기관장 업무보고

 저는 정말 많은 업무보고 자료를 썼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로베이스에서 만드는 보고서는 포트폴리오로 관리하는 재미라도 있는데 기획부서에서 이른바 '취합'을 위해서 내려 보내는 문서를 쓸 때는 좀 지겹고 지루합니다. 그냥 니들이 그전 결과 보고 같은 거 참조해서 쓰면 안 되나. 물론 이기적인 생각이긴 해요. 사업이 200개가 넘고 예산에 500개가 넘는 데다 1년 지출전표가 100,000건이 넘는 회사라면 결과보고는 또 얼마나 많을 거고 거기 붙은 세부 자료는 또 얼마나 많겠어요. 처음엔 좀 툴툴거렸는데 노조를 하고 회사가 작동되는  걸 알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3. 기관장 업무 보고


 내가 있던 기관은 1월 말 2월 초와 7월 말 8월 초에 각각 기관장 업무보고를 했습니다. 본부장이랑 팀장들이 주르륵 딸려 들어가서 우리 이런 일 하고 있습니다 하는 자리고 기관장은 내가 기관장이다 이러며 허세를 부리는 사실은 하등 쓸모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행사입니다. 물론 조직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일련의 관료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기관장의 영이 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라는 기능이 인정할 수도 있겠네요. 10여 년 공공기관 경력 동안 기관장의 의지가 사업이나 업무에 실제로 작용하는 건 대부분 부정한 청탁 등 다분히 지저분한 일일 경우로 제한됩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사업이나 기관의 미래 따위는 관심 없어요. 기관장씩이나 되니까 그분들의 깊고 깊은 진심 따위를 내가 알 수는 없지만, 그간 본 바로는 그래요. 한 번은 유학파 출신 기관장과 사적으로 술을 마신 일이 있었는데 당신도 그런 업무 보고가 일종의 제례이자 의식이고 기관장 입장에선 매우 즐거운 이벤트 일 수 있다고 지나가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하는 보고의 대부분은 제의고 의식입니다. 관료제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힘이 형식과 절차라는 걸 잊지 맙시다.


기관장 업무보고를 위해 몇 주 전부터 공문이 옵니다. 작성 대상 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존 자료를 활용하되 업데이트하도록. 이미 간부 회의에서 기조실장이 곧 당신의 일하는 척을 위해 하반기 업무 보고를 진행할 예정이오니 본부장님 및 이하 부서장님들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라는 보고가 지난 후다. 기관장은 넌지시 업무 보고라는 보직자들의 충성도를 시험할 냄새를 풍깁니다. 어떤 어떤 걸 볼 거고 하반기 인사 검토하겠다는 엄포를 놓는 못된 사람들도 있어요. 간부 회의가 끝나는 시간은 문서가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해요. 본부장들은 간부회의가 끝나면 부서장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대부분은 건너 들었고 간혹은 직접 들었습니다만 대부분 별거 아닌 얘기들입니다. 하반기의 전략을 집중해라. 무슨 지표를 활용해라 등등. 신기한 건 나중에 취합해 놓은 자료를 보면 각 본부별 전략이니 배경이 대동소이합니다. 기관장의 한마디서 정답을 찾다 보니 비슷한 경향으로 흐르는 거죠. 


본부장 회의가 끝나면 팀장이 담당자를 따로 부릅니다. 입사 초기 2년을 제외하곤 거의 매년 그런 건 내가 작성했어요. 부서원들과 공유하기 전에 팀장이 날 따로 부릅니다. 기관장은 이런 옵션을 요구했고 본부장은 이렇게 한다는데, 내 생각은 이렇다. 너 생각은 어떠냐. 알겠습니다. 부서 회의 때 말씀 주시면 제가 방향 잡고 진행하겠습니다. 10명도 안 되는 부서지만 업무 체계를 위해서는 사전 많은 모의가 필요한 법니다. 오후에 부서 회의가 열리면 팀장은 간부진 회의에서 어떤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본부장은 뭐라고 했는지, 팀장 당신의 생각이나 지시사항은 뭔지가 죽 읊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준비된 대로 업무보고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거는 00 과장이 좀 정리를 좀 하고 팀원들은 작성하는 거 돕고. 네 알겠습니다. 이런 데서 저 하기 싫은데요, 왜 제가 하나요 하면 팀이 무너지는 길입니다. 자연스럽게 책임이 나에게 넘어오고 나는 그 사이 검토했던 타임 테이블과 작성계획을 얘기합니다. 일단 제가 초안 잡아서 공유드릴 테니까 수치나 내용 틀린 게 있으면 알려 주세요.


 소위 주무 부서의 본부 주무가 단톡방에 자료를 공유합니다. 기관장이 이런 지시를 했고 본부장은 이런 지시를 했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으레 조금의 딴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건 중요한 자료가 아니니까요. 교태나 기교 같은 건 부리지 않고 명확하게 우리가 얼마나 고생스럽게 일했고 또 하반기엔 얼마큼 고생스럽게 일할 계획인지를 찬찬히 채웁니다. 한글을 쓰는 공공에선 표 쓰는 게 무척 중요한 기술입니다. 길면 한 장 정도를 허락받는 상반기 추진 성과에 하이라이트에 표 등 온갖 기교가 들어갑니다. 저는 파워포인트에서 이미지 따오는 걸 싫어하거든요. 초안을 잡고 팀원들에게 공유합니다. 16시까지 회신 주시면 내용 담아서 팀장께 보고 하겠습니다. 나는 단톡을 싫어해서 보통은 메일로 소통을 했어요. 직원들은 별로 쓸 내용이 없습니다. 내가 내용을 거의 다 채웠으니까요. 한 두 개 틀린 숫자, 기준점 등을 점검합니다. 만일 함께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그래서 서로의 성장에 유효하다면 억지라도 같이 했겠죠. 이건 그 정도 가치가 없어요. 그래서 대부분은 혼자 썼습니다. 이제 팀장에게 보고합니다. 야 이거 좀 너무 과하지 않냐? 뺄까요? 아냐 어차피 본부 회의 또 할 텐데. 요거요거 숫자 봤어? 담당자 확인 했습니다. 요거는 좀 나가면 위험하지 않겠냐? 네 생각은 했는데 보여드리고 빼려고요. 그래 이거 빼고 주무한테 보내. 완성본 보여드릴게요. 됐어 그냥 보내. 네 알겠습니다. 팀장 지시를 반영해 부서원 전원을 참조로 걸고 주무부서 주무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이어서 본부장은 본부 내에 취합된 자료를 바탕으로 팀장들을 불러 모읍니다. 회의가 끝나면 팀장들 마다 또 표정이 달라요. 너 때문에 옆 팀 애들 보고서 다 고치게 됐다야. 왜요? 본부장이 OO 과장이 쓴 형식으로 보고서 고치고 기준치 고치래. 저흰 뭐 고칠 거 없데요? 어, 이거 이거 숫자 다시 확인하고, 요 내용은 아래로 보내는 게 낫다고 하시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래. 이렇게 고치자. 네 알겠습니다. 수정 작업이 몇 차례 이뤄지면서 본부 전전체에 할애된 고작 대여섯 장 보고서가 일주일에 걸쳐 꾸며집니다. 사실 혼자 쓰면 두 시간도 안 걸릴 보고선데 말이에요. 예전에 어떤 본부장님 과는 일곱 번인가 본부장실에 오가면서 자료를 빨간 펜으로 그어가며 수정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요. 이젠 언성을 높이고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반복은 가능하면 최소화하게 됐으니까요. 몇 번 더 고쳐진 자료가 주무에게 취합되고 주무는 담당 부서인 기조실로 날려 보냅니다. 기조실은 며칠 후에 모든 부서의 '취합된 자료'를 인트라넷 게시판에 업로드하고 부서장 및 각 부서 담당자 메일로 보내줍니다. 몇몇 부서는 뒤늦게 공개된 자료를 보고 자기네 자료를 수정하기도 합니다. 허접한 거죠. 척 봐도 퀄리티 떨어지는 보고서는 내가 봐도 코웃음이 쳐지지만 문서가 다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이윽고 공개된 본부별 업무 보고 타이밍. 나 같은 실무자는 들어갈 일이 없으니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이 아저씨들을 응원할 밖에. 어느 본부는 작살이 났다더라, 어느 팀장은 쌍욕을 먹었다더라. 소문이 무성합니다. 공공기관에서 누군가에게 나쁜 얘기는 늘 빨리 도는 법입니다. 평균 나이 50살 먹은 이 아저씨들은 또 '가다마이'를 갖춰 입고 기관장실로 향합니다. 그전엔 종이를 한가득 출력해 갔는데 요샌 페이퍼리스다 뭐다 커다란 태블릿 PC에 회사 다이어리를 안고 갑니다. 그들이 떠난 사이 사무실은 조용해져요. 조용한 긴장감이랄까요. 혹시 추가자료를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간간히 톡이 날아옵니다. 이 숫자 이거 뭐였지? 이거 숫자 확인 했냐? 작년도에 이거 몇 개였지? 나는 급하게 자료를 지원합니다. 가끔은 기관장실에 달려가 출력물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한 시간 반쯤이 지나면 아저씨들이 내려옵니다. 기관장이 어지간히 선량한 사람이라도 보고를 받는 사람은 문제를 찾는 쪽, 즉 공격하는 입장이고 보고를 하는 쪽은 문제를 숨기는 쪽, 즉 수비하는 입장이 되니 어쩔 수 없는 심리싸움이자 역할 놀이라 그렇습니다. 본부장 포함해 서넛에서 대여섯 되는 보직자들이 내려오면 직원들은 말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끝나셨어요~. 잘 끝났어. 어떤 팀은 다시 부서 회의를 해 기관장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어떤 부서는 지친 부서장이 담배 피우러 사라지는 등 후일담은 케바케입니다.


 이 보고의 효용성은 보직자에 대한 긴장감 부여 정도 말고는 없지만 이런 보고를 하느라 회사가 거의 한 달 동안 멈춰집니다. 그런데 기관장 보고는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 약과 중에 약과인 보고입니다. 의회보고와 행정사무감사라는 지독하고 한심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심지어 악의적인 제도와 비교하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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