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사무감사의 예고편 기관장 업무보고
저는 정말 많은 업무보고 자료를 썼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로베이스에서 만드는 보고서는 포트폴리오로 관리하는 재미라도 있는데 기획부서에서 이른바 '취합'을 위해서 내려 보내는 문서를 쓸 때는 좀 지겹고 지루합니다. 그냥 니들이 그전 결과 보고 같은 거 참조해서 쓰면 안 되나. 물론 이기적인 생각이긴 해요. 사업이 200개가 넘고 예산에 500개가 넘는 데다 1년 지출전표가 100,000건이 넘는 회사라면 결과보고는 또 얼마나 많을 거고 거기 붙은 세부 자료는 또 얼마나 많겠어요. 처음엔 좀 툴툴거렸는데 노조를 하고 회사가 작동되는 걸 알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3. 기관장 업무 보고
내가 있던 기관은 1월 말 2월 초와 7월 말 8월 초에 각각 기관장 업무보고를 했습니다. 본부장이랑 팀장들이 주르륵 딸려 들어가서 우리 이런 일 하고 있습니다 하는 자리고 기관장은 내가 기관장이다 이러며 허세를 부리는 사실은 하등 쓸모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행사입니다. 물론 조직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일련의 관료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기관장의 영이 통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라는 기능이 인정할 수도 있겠네요. 10여 년 공공기관 경력 동안 기관장의 의지가 사업이나 업무에 실제로 작용하는 건 대부분 부정한 청탁 등 다분히 지저분한 일일 경우로 제한됩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사업이나 기관의 미래 따위는 관심 없어요. 기관장씩이나 되니까 그분들의 깊고 깊은 진심 따위를 내가 알 수는 없지만, 그간 본 바로는 그래요. 한 번은 유학파 출신 기관장과 사적으로 술을 마신 일이 있었는데 당신도 그런 업무 보고가 일종의 제례이자 의식이고 기관장 입장에선 매우 즐거운 이벤트 일 수 있다고 지나가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하는 보고의 대부분은 제의고 의식입니다. 관료제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힘이 형식과 절차라는 걸 잊지 맙시다.
기관장 업무보고를 위해 몇 주 전부터 공문이 옵니다. 작성 대상 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존 자료를 활용하되 업데이트하도록. 이미 간부 회의에서 기조실장이 곧 당신의 일하는 척을 위해 하반기 업무 보고를 진행할 예정이오니 본부장님 및 이하 부서장님들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라는 보고가 지난 후다. 기관장은 넌지시 업무 보고라는 보직자들의 충성도를 시험할 냄새를 풍깁니다. 어떤 어떤 걸 볼 거고 하반기 인사 검토하겠다는 엄포를 놓는 못된 사람들도 있어요. 간부 회의가 끝나는 시간은 문서가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해요. 본부장들은 간부회의가 끝나면 부서장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대부분은 건너 들었고 간혹은 직접 들었습니다만 대부분 별거 아닌 얘기들입니다. 하반기의 전략을 집중해라. 무슨 지표를 활용해라 등등. 신기한 건 나중에 취합해 놓은 자료를 보면 각 본부별 전략이니 배경이 대동소이합니다. 기관장의 한마디서 정답을 찾다 보니 비슷한 경향으로 흐르는 거죠.
본부장 회의가 끝나면 팀장이 담당자를 따로 부릅니다. 입사 초기 2년을 제외하곤 거의 매년 그런 건 내가 작성했어요. 부서원들과 공유하기 전에 팀장이 날 따로 부릅니다. 기관장은 이런 옵션을 요구했고 본부장은 이렇게 한다는데, 내 생각은 이렇다. 너 생각은 어떠냐. 알겠습니다. 부서 회의 때 말씀 주시면 제가 방향 잡고 진행하겠습니다. 10명도 안 되는 부서지만 업무 체계를 위해서는 사전 많은 모의가 필요한 법니다. 오후에 부서 회의가 열리면 팀장은 간부진 회의에서 어떤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본부장은 뭐라고 했는지, 팀장 당신의 생각이나 지시사항은 뭔지가 죽 읊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준비된 대로 업무보고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거는 00 과장이 좀 정리를 좀 하고 팀원들은 작성하는 거 돕고. 네 알겠습니다. 이런 데서 저 하기 싫은데요, 왜 제가 하나요 하면 팀이 무너지는 길입니다. 자연스럽게 책임이 나에게 넘어오고 나는 그 사이 검토했던 타임 테이블과 작성계획을 얘기합니다. 일단 제가 초안 잡아서 공유드릴 테니까 수치나 내용 틀린 게 있으면 알려 주세요.
소위 주무 부서의 본부 주무가 단톡방에 자료를 공유합니다. 기관장이 이런 지시를 했고 본부장은 이런 지시를 했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으레 조금의 딴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건 중요한 자료가 아니니까요. 교태나 기교 같은 건 부리지 않고 명확하게 우리가 얼마나 고생스럽게 일했고 또 하반기엔 얼마큼 고생스럽게 일할 계획인지를 찬찬히 채웁니다. 한글을 쓰는 공공에선 표 쓰는 게 무척 중요한 기술입니다. 길면 한 장 정도를 허락받는 상반기 추진 성과에 하이라이트에 표 등 온갖 기교가 들어갑니다. 저는 파워포인트에서 이미지 따오는 걸 싫어하거든요. 초안을 잡고 팀원들에게 공유합니다. 16시까지 회신 주시면 내용 담아서 팀장께 보고 하겠습니다. 나는 단톡을 싫어해서 보통은 메일로 소통을 했어요. 직원들은 별로 쓸 내용이 없습니다. 내가 내용을 거의 다 채웠으니까요. 한 두 개 틀린 숫자, 기준점 등을 점검합니다. 만일 함께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그래서 서로의 성장에 유효하다면 억지라도 같이 했겠죠. 이건 그 정도 가치가 없어요. 그래서 대부분은 혼자 썼습니다. 이제 팀장에게 보고합니다. 야 이거 좀 너무 과하지 않냐? 뺄까요? 아냐 어차피 본부 회의 또 할 텐데. 요거요거 숫자 봤어? 담당자 확인 했습니다. 요거는 좀 나가면 위험하지 않겠냐? 네 생각은 했는데 보여드리고 빼려고요. 그래 이거 빼고 주무한테 보내. 완성본 보여드릴게요. 됐어 그냥 보내. 네 알겠습니다. 팀장 지시를 반영해 부서원 전원을 참조로 걸고 주무부서 주무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이어서 본부장은 본부 내에 취합된 자료를 바탕으로 팀장들을 불러 모읍니다. 회의가 끝나면 팀장들 마다 또 표정이 달라요. 너 때문에 옆 팀 애들 보고서 다 고치게 됐다야. 왜요? 본부장이 OO 과장이 쓴 형식으로 보고서 고치고 기준치 고치래. 저흰 뭐 고칠 거 없데요? 어, 이거 이거 숫자 다시 확인하고, 요 내용은 아래로 보내는 게 낫다고 하시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래. 이렇게 고치자. 네 알겠습니다. 수정 작업이 몇 차례 이뤄지면서 본부 전전체에 할애된 고작 대여섯 장 보고서가 일주일에 걸쳐 꾸며집니다. 사실 혼자 쓰면 두 시간도 안 걸릴 보고선데 말이에요. 예전에 어떤 본부장님 과는 일곱 번인가 본부장실에 오가면서 자료를 빨간 펜으로 그어가며 수정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요. 이젠 언성을 높이고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반복은 가능하면 최소화하게 됐으니까요. 몇 번 더 고쳐진 자료가 주무에게 취합되고 주무는 담당 부서인 기조실로 날려 보냅니다. 기조실은 며칠 후에 모든 부서의 '취합된 자료'를 인트라넷 게시판에 업로드하고 부서장 및 각 부서 담당자 메일로 보내줍니다. 몇몇 부서는 뒤늦게 공개된 자료를 보고 자기네 자료를 수정하기도 합니다. 허접한 거죠. 척 봐도 퀄리티 떨어지는 보고서는 내가 봐도 코웃음이 쳐지지만 문서가 다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이윽고 공개된 본부별 업무 보고 타이밍. 나 같은 실무자는 들어갈 일이 없으니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이 아저씨들을 응원할 밖에. 어느 본부는 작살이 났다더라, 어느 팀장은 쌍욕을 먹었다더라. 소문이 무성합니다. 공공기관에서 누군가에게 나쁜 얘기는 늘 빨리 도는 법입니다. 평균 나이 50살 먹은 이 아저씨들은 또 '가다마이'를 갖춰 입고 기관장실로 향합니다. 그전엔 종이를 한가득 출력해 갔는데 요샌 페이퍼리스다 뭐다 커다란 태블릿 PC에 회사 다이어리를 안고 갑니다. 그들이 떠난 사이 사무실은 조용해져요. 조용한 긴장감이랄까요. 혹시 추가자료를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간간히 톡이 날아옵니다. 이 숫자 이거 뭐였지? 이거 숫자 확인 했냐? 작년도에 이거 몇 개였지? 나는 급하게 자료를 지원합니다. 가끔은 기관장실에 달려가 출력물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한 시간 반쯤이 지나면 아저씨들이 내려옵니다. 기관장이 어지간히 선량한 사람이라도 보고를 받는 사람은 문제를 찾는 쪽, 즉 공격하는 입장이고 보고를 하는 쪽은 문제를 숨기는 쪽, 즉 수비하는 입장이 되니 어쩔 수 없는 심리싸움이자 역할 놀이라 그렇습니다. 본부장 포함해 서넛에서 대여섯 되는 보직자들이 내려오면 직원들은 말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끝나셨어요~. 잘 끝났어. 어떤 팀은 다시 부서 회의를 해 기관장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어떤 부서는 지친 부서장이 담배 피우러 사라지는 등 후일담은 케바케입니다.
이 보고의 효용성은 보직자에 대한 긴장감 부여 정도 말고는 없지만 이런 보고를 하느라 회사가 거의 한 달 동안 멈춰집니다. 그런데 기관장 보고는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 약과 중에 약과인 보고입니다. 의회보고와 행정사무감사라는 지독하고 한심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심지어 악의적인 제도와 비교하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