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일제에 맞선 다양한 독립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 일제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군을 앞세워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투에 나섰다.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함께 한반도 침투를 위한 한국광복군의 독수리 작전과 미국 내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냅코 작전이 준비되기도 하였다. 한국인의 독립 노력으로 연합국인 3개국 정상이 만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결의되었고 포츠담 회담에서 다시 확인하였다.
독일이 항복하고 1945년 7월 연합국 대표는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도 8월 9일 일본 제국이 세운 만주국을 공격해서 8월 12일 만주 전역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8월 13일 한반도 두만강 지역의 웅진항과 나진항을 점령하며 일본군을 소탕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일제는 미국의 원자폭탄과 소련의 공격으로 서둘러 항복함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게 되자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으려고 8월 11일, 38도선을 제안한다. 소련이 8월 16일,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38도선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둔하게 된다.
미국군은 1945년 9월 8일, 점령군으로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일본 국기 대신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미 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임을 내세우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기구를 그대로 미군정의 기구로 삼고, 미군정에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중앙과 지방의 한국인 및 일본인 관리들을 당분간 계속 근무토록 한다는 방침이 시행되었다.
이후 미 군정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이어졌다.
※ 미군정 포고문
1.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3. ……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또는 공공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포고령’ 제1호
소련군은 북한 지역을 관할하면서 미군과는 달리 직접 군정에 나서지 않고 해방군을 자처하며 간접 통치 방식을 취했다. 시베리아 부근에 거주한 수십만 명의 한국인 이민자 중 3만여 명을 이주시켜 소련군과의 중재자 역할을 맡겼다. 이로써 상당한 조직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지원으로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 소련군 포고문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 주었다. - ‘소련 극동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포고문’ 제1호
소련의 영향력으로 동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 공산 정권이 성립되고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상황에서 소련은 한반도의 공산화에 자신이 있었다.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공산주의자인 김일성을 지원해서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소련과 대립했던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서 38도선을 제안했고 점령군으로 38도선 이남을 직접 지배하게 된다.
여운형은 1944년 국내에서 결성한 조선 건국동맹을 8·15 광복과 함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로 개편하며 사회 안정과 생활 안정에 힘쓰며 미군을 맞이하기 위해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세웠다.
김성수 등은 건준의 활동에 비판적인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9월 16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미국에서 돌아와 지지 세력을 모아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은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1945년 11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한국 독립당으로 정당 등록을 하였다.
박헌영은 8·15 광복 직후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당시 핵심 과제는 새로운 국가의 수립이었는데, 국내외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힘을 모으지 못했다. 좌익과 우익 진영에 속하는 유력한 정치 세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졌고, 그럴수록 힘의 중심은 점점 미국과 소련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3년 동안 이어졌다.
★ 우익 세력으로는 김성수, 이승만, 김구를 들 수 있고 죄익 세력으로는 박헌영을 들 수 있다.
중도 세력 중에 중도 우익엔 김규식, 중도 좌익은 여운형이 대표적이다.
광복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좌익은 사회주의 세력을 우익은 자본주의 세력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공동소유를 통해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를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제이며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는 반면에 공산주의는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를 내세우며 개인의 재산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산업혁명을 통한 빠른 경제 발전 속에 빈부의 극심한 격차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모두가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현재 세계는 자유 경쟁을 통한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