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 반석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이승만 대통령 취임사’,1948. 7. 24.-
1948.5.10.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국제연합 한국 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되었다.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지만 95.5%의 투표율을 기록한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 선거였다. 선거 결과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이듬해 제주에서 2명).
5월 31일 처음 개회한 제헌 국회는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 등을 선출했다. 7월 1일에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 17일엔 제헌 헌법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 7월 20일에 원내 선거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선출되었고, 8월 15일 미군정 폐지를 발표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한편 북에서는 1948.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948.12.12. 국제연합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제주도에선 제주 4·3 사건 이후 불만과 분노로 5·10 총선거를 실시하지 못했고 시위는 정부 수립 후에도 이어졌다. 1948년 10월, 이승만 정부는 여수에 주둔한 부대를 제주도에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부대 내 좌익 세력들이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여수·순천 지역을 점령하고 한때 광주·남원까지 진출하였다(여수·순천 10·19사건).
정부는 미군의 도움을 받아 1주일 만에 반군을 진압하였다(10.27.). 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일부 반군은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빨치산(비정규군, 공산 게릴라)으로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공 체제 강화를 위해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고 국민 보도 연맹을 조직하였다.
★국가 보안법 : 194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내에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의 치안유지법과 보안법을 기반으로 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국민 보도 연맹 :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의 사상 개조를 목적으로 조직하였는데, 사회주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비료와 배급을 받기 위해 다수가 가입하였다. 6·25 전쟁 때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에 협조할 것이라 의심된다고 하여 군인·경찰에 의해 민간인이 살해되었는데 그 수가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민족 반역자 처벌을 위해 제헌 국회는 제헌 헌법의 특별 규정에 따라 1948.9.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고, 국회 직속으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반민 특위는 국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검거해 나갔다. 이때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우선시하며 반민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 반민 특위 소속 국회의원 중 일부를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구속하였고, 경찰이 반민 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결국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개정되어 친일파 처벌 기한이 1949년 8월까지로 줄어들었고, 반민족 행위의 범위도 축소되었다. 1951년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폐지되면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청산은 실패하였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시기의 문제이다. 8·15 광복 직후 점령군으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은 총독부 권력 기구와 인원을 그대로 두고 이를 활용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1946년 당시 미군정 경찰 간부의 80% 이상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고, 이후 군인 · 경찰 · 관리로 일제 식민 지배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친일 분자들이 대부분 핵심 요직에 다시 등용되었다. 경찰은 기술과 경험이 요구되는 특수기술직이라는 생각과 친일 경찰들은 빠른 속도로 공산주의와 맞설 수 있는 반공투사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세상에서 살길을 찾게 되었다. 미군정을 이어 이승만 정부에서도 친일파를 정권 장악과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친일파 청산보다는 내부 단결과 반공 태세가 더 급하다는 입장이었다.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되며 특별 재판부 구성, 7천여 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선정하고 주요 인물에 대한 조사와 체포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한 건도 없었으며, 대부분 감형되거나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노덕술은 일제 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하였다. 광복 후에는 김원봉을 체포·고문하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15명의 암살을 모의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 라고 석방을 요구했고 결국 풀려나서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이 되었다. 1950년에는 육군본부에서 범죄 수사단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광복 당시 전체 경작지의 60% 이상이 소작지였다. 광복 이후 대다수 농민은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북한 지역에서 토지 개혁이 진행되자 남한에서도 토지 개혁에 대한 바람이 커졌다.
제헌 국회는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한다는 내용을 제헌 헌법에 담았으며, 1949년 6월에는 농지 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3월, ‘유상 매입, 유상 분배’(국가가 지주에게 대가를 주고 토지를 사들인 뒤, 농민에게 대가를 받고 분배하는 방식)의 방식으로 농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한 가구당 3정보를 소유 상한으로 하고, 그 이상의 농지는 국가가 지가 증권(국가가 농지 매입 대가로 토지 소유주에게 지급한 문서)을 발급하여 사들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농지 개혁으로 지주·소작제는 거의 사라졌으며, 농민 대부분이 자기 농지를 갖게 되어 생산 의욕이 높아졌다. 하지만 6·25 전쟁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보탰다. 전쟁으로 농지 개혁법의 전면 실시가 미뤄졌다가 1953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받은 농지의 연평균 수확량에 1.5배를 5년 동안 나누어내야 하는 유상 분배의 부담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포기하는 농민도 있었다. 지주층은 전쟁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화폐가치가 하락한 데다 지가 증권의 현금화 시기가 늦어지면서 산업자본가로의 전환에 실패하고 몰락하였다.
★ 광복 이후 우리 기업의 성장은 귀속재산(일본인 소유 재산)과 원조 물자 배분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기업은 2,700여 개에 달했다. 이승만 정부가 민간에 팔 때 시가의 1/4~1/5 정도였고, 상환 기한은 최고 15년까지였다. 싼 가격과 장기 분할 상환은 큰 특권이었다. 여기에 미국이 무상으로 보내준 밀, 사탕수수, 면화 등의 분배 과정에도 특정 기업에 혜택이 집중되었다.
결국 귀속재산과 원조 물자가 민간에 넘겨지며 독점적 대기업이 형성되었고, 정경유착의 문제가 나타났다. 이 상황이 훗날 재벌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