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이후 3년간의 미·소 군정 기간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권이 각각 들어서면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남북은 서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남한과 달리 일찍이 토지 개혁과 중요 산업 시설 국유화를 통해 통치 기반을 확립한 북한 정권은 군사력 증강을 통해 남한을 압도할 군비를 갖춰갔다. 이 무렵 소련의 핵 개발 성공, 중국에서 공산 정권의 대륙 장악 상황에서 소련은 북한의 남쪽 침략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1950. 1. 12.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으로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제시하며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전쟁의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2개월 후에는 낙동강 일대까지 진격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1950년 6월 25일, 6월 27일, 7월 7일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의 불법 남침을 규탄하고 유엔군 파병을 위한 회원국의 협조를 요청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다.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10월 1일 북한 영토로 진격해서 10월 10일 원산, 17일 함흥과 흥남,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으로 북한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후퇴했다. 소련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으로 도망가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도록 권고하기도 하였다.
중국이 30여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11월 28일, 유엔군은 전면적 후퇴를 결정한다. 중국이 나선 이유로 미국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이 중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한반도에서 미군을 저지하고자 했다고 보기도 한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12월 3일, 모든 부대를 38선으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하였다. 세계적인 반전 여론과 핵 전쟁 우려 등으로 맥아더가 해임되고 100만 명 이상 파병된 중국군에 의해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면서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1951.1.4. 1·4후퇴).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총공세를 전개하여 1951년 중반에는 지금의 휴전선 일대까지 올라갔다. 이후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상황이 이어졌다.
▮ 정전협정 체결
소련의 제안으로 1951년 6월부터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국 공산군 사이에 정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등의 문제로 회담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38도선 부근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회담 상황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정전에 반대하여 북한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는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참담했던 전쟁은 3년 1개월 만에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끝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마무리되었다. 포로 송환은 자유의사를 존중하기로 하였으며 군사 분계선(휴전선)을 정하고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었다. 정전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도 미국에서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과 무상 경제 원조를 약속받고 정전협정을 받아들였다.
▮ 전쟁 피해
6·25 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아픔과 재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치열한 싸움으로 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에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중 다수의 죽음은 명분도 의미도 없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군인 사상자 수는 90만, 미군 40만, 유엔군 3만, 북한군 51만, 중국군 50만 등 이었다. 민간인 사상자 수는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가거나 끌려간 사람이 30만 명,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이 50만~100만 명가량에 전쟁미망인 20만 명,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발생했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산업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남·북한의 수많은 주택·학교·공공 건물과 농토 등도 큰 피해를 당하였다.
전쟁 초기 남한을 점령한 북한 측은 인민 재판을 명목으로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 남한 측도 북한 지역을 점령한 후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점령 지역의 주민들은 점령 주체가 바뀔 때마다 상대방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벌당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증오와 불신, 원한이 커졌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 체제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전투 행위를 중지한 것이다.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분단으로 남·북한의 이질화는 더욱 확대되었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독재 체제 강화로 이어지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되어 갔다.
6·25 전쟁은 전쟁에 참여한 모두가 이겼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아무도 이기지 못한 전쟁이었다. 또한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다. 그 영향으로 전쟁 후에 많은 것이 변화되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돌아보면 남한과 북한이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싸울 이유도 상황도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우익과 좌익이 나타났고 각자의 방식 대로, 상황에 따라선 민족 협동 전선이나 유일당 운동을 통해 힘을 모아서 민족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4년, 국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때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이 나라가 독립과 함께 두개로 나눠지고 치열한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8·15 광복 후부터 함께 힘을 모아 새로운 역사를 이끌었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우리 역사 속에 분열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대시하며 대립했던 시간은 없다.
역사는 과거지만 현재고 미래다. 현재의 분명한 기억을 통한 역사 인식이 미래에의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모두의 바람이길 바라며 그 답을 역사 속에서 찾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