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AI를 곁들인...
1. 생각의 방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생각이 이루어지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이 유동적이라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곳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액체가 가두고 있는 용기의 모양을 따라가듯 생각도 담기는 그릇(자아)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붓다의 말씀에 따르면 ‘자아’란 허상에 불과합니다. 자아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어서 자아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자아가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죠.
3. 일견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단‘법인’을 떠올리면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분명 법인이라는 것은 법률상으로 존재하는 것뿐이고 그 구성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법인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치 나무와 숲의 관계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4. 이렇게 자아가 없는 상태 ‘무아’의 개념을 수용하려 할 때 만나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럼 외부로부터 자극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죠. 그릇이 없다면 자극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일 텐데 우리는 모두 자극에 대해 반응을 하며 살아가니까요. 반응이 있다는 점에서 자극을 감각하는 수용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5. 여기에 대해 붓다가 말씀하시기를 그 감각수용체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반짝 존재하는 것이며 자극이 지나가는 순간 사라진다 하십니다. 그것이 생각이건 감정이건 매 순간순간 외부자극에 의해 번쩍였다 사라질 뿐이지 감각수용체는 하나의 무엇으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6. 이 가르침은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이 같은 물처럼 보이지만 물은 매 순간 흘러가기 때문에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붓다의 자아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인 셈입니다.
7. 하지만 물은 흘러도 강둑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정신이 강물이라면 강둑은 육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육신도 매일 생기고 또 매일 죽어나가는 세포를 떠올리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마치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셈이죠.
8. 그렇다면 정신과 육신 모두 매 순간마다 존재할 뿐 그 모든 순간에 계속 존재하는 어떤 것은 없다는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마치 선(line)이란 없는 것이며 점의 무한한 집합일 뿐이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하니까요.
9. 그러나 우리의 감각수용체가 반응의 일관성을 가지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순간의 자극에 반응할 뿐이라면 같은 자극에 다른 반응이 나오는 순간도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같은 자극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10. 즉 우리는 어제의 아버지를 보고도 아버지라 반응하며 오늘의 아버지를 보고도 아버지라 반응합니다. 이런 자극-반응 간의 일관성의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면 혹시 이 일관성을 ‘자아’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 만약 이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의 일관성1)이 자아의 본질이라면,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별적인 자극의 뭉치인 경험이 일관성으로 침전되면 개성이 되고, 개성을 가진 인공지능은 또 해탈을 꿈꾸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쩍’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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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지과학에서는 이 일관성을 연속체라고 부릅니다. 마치 수학에서 실수의 연속성을 연상하게 된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