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물을 달고 살아 늘 소매가 반들반들하던 내 어린 시절에 가끔 우리 집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1년에 두세 번쯤 잊을 만하면 얼굴을 들이밀던 그는 올 때마다 내 두 손에 동전을 한 움큼씩 쥐어주었다. 돈이라고는 써볼 데도 없는 촌구석이고 쓸 줄도 모르던 코흘리개였지만 그래도 손안 가득 묵직한 느낌이 마냥 좋아서 그를 볼 때마다 헤벌쭉 웃으며 두 손을 내밀곤 했다. 엄마와 누나밖에 없는 집이라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엄마가 해바라기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는 날이면 아침부터 동네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반나절을 기다리곤 했다. 그 기다림은 철없던 내게 두 손 가득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기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국민학교를 입학한 - 그가 유난히도 오래 우리 집에 머물렀던 그 해에 처음으로 그림일기를 썼다. 담임선생님께 받은 '참 잘했어요'라는 글귀의 도장을 자랑이라도 할 요량으로 그의 턱 밑에다 일기장을 펼쳤는데 웬일인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영문을 모르고 무안해져서 얼굴이 붉어진 나는 엄마의 당혹스러운 눈길을 받고 그제야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행복한 우리 집'이라는 제목 아래에는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내게 아빠라는 단어는 동전 쥐어 주는 사람. 그것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아버지에게 육 남매의 맏이로 부모를 여읜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원양어선을 타고 외로운 신혼을 보내며, 아들에게 돈 벌어오는 이로 전락해 버린 채 남매들을 대학에 보내야 했고, 다시 짝을 지어준 뒤에야 그 형벌 같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아버지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우리 식구는 서너 달에 한 번꼴로 이사를 했는데 그런 후면 아버지는 으레 단벌 정장을 입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하지만 대개 아버지의 정장 차림은 달포를 넘기지 못했고 그렇게 두어 달을 더 머무르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곤 했다. 그렇게 옮긴 집은 먼저 번보다 작은 경우가 많아서 우리 집의 세간살이는 점점 더 단출해져 갔다.
아버지의 어깨에 내 머리가 닿을 무렵의 나는 더 이상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할 만큼 내성적이었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공 한 번 차본 일이 없을 만큼 밖으로 돌지 않았다. 그나마의 위안은 상위권을 유지하는 성적일 뿐. 할아버지의 제사가 다가오던 어느 날, 차비를 아끼고 아껴 먹음직한 붕어빵을 샀었다. 원체 돈 구경하기가 나라님 용안 보기보다 힘든 집이었던지라 한창 클 나이에도 충분히 먹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 차비로 준 돈을 아껴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을 두어 시간씩 며칠을 다리품을 팔고 난 다음 손에 넣은, 그야말로 '금'붕어빵인 셈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건넨 풀빵은 종이봉투째 고스란히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완고함, 도무지 다가설 수 없는 건조함......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숨을 씨근대는 아버지의 얼굴은 옛날 일기장을 외면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이후 내 성적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우리 집은 이른바 달동네 판자촌으로 이사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벽이 달랑 판자때기 몇 장으로 만들어져 누가 집을 밀면 금방이라도 스러져 버릴 것 같은 집이었는데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다닥다닥 등을 붙이고 누워야 겨우 잠을 잘 만큼 비좁기도 했다. 그 지경이 되도록 일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못마땅해 더욱 책을 멀리했고 고등학교 무렵에는 가세도 내 성적도 더 이상 밑을 볼 수 없을 만큼 바닥을 쳤다. 제사가 다가올 무렵이면 혼자 방 안에서 자욱하게 담배 연기를 피우며 돌아앉은 뒷모습이 보기 싫어 집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고, 고3 시절에는 아예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집에 발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가 쥐어 준 입학 원서 값은 소주로 변해 빈속을 채웠고 만취한 내 얼굴에는 아버지의 손도장이 찍혔다. 그다음 날 짐을 꾸리는 내 뒤에서 한참이나 예의 그 씨근대던 숨소리가 들렸다. 닥치는 대로 일하고 쥐이는 대로 먹고 아무 데서나 자기를 1년, 사발면을 씹으며 재수학원 다니기를 1년...... 나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대학에 입학했고 공부보다는 돈을 벌기에 급급했다.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고서 학점이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다. 학사경고를 받고서야 정신이 든 나는 어떻게든 내 2년을 보상받고 싶었다.
군대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사인을 한 다음엔 각막이 떨어져 버릴 듯한 추위 속에서 낙하산을 탔고, 머리가죽을 벗어놓고 싶을 만큼의 더위 속에서 천 리를 걸었다. 남들이 까먹는 셈 치는 군복무 기간 동안 종잣돈을 마련해서 제대하려는 속셈이었다.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만큼 미쳐서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앞이었다. 첫 휴가를 받아서도 넋을 잃고 헤매다 집으로 온 거였다. 아버지는 싫었지만 어머니를 봬야 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문턱을 넘었지만 거기에 아버지는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죽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표정으로 뛰쳐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 안에서 멀미가 날 만큼 일렁거렸다.
그날 저녁 상다리가 휠만큼의 밥상을 받고서야 아버지의 거취를 물었다. "니 아부지 배 탄다 아이가. 니 아나? 느그 아부지 왜 배 그만 탔는지, 아나?" 어머니는 고해성사를 하듯 지난 세월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컨테이너선을 탈 무렵 바다 위에서 폭풍을 만나 배 아래로 떨어져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했다. 6개월 남짓 요양 후에 -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그 해, 유난히 집에 오래 있던 그 해에 아버지의 기억이 돌아왔다 했다. - 기적적으로 회복된 뒤로 다시 배 탈 엄두를 못 내고 다른 직업을 구하러 전전했다고 했다. 그렇게 잦은 이사 속에서, 구직의 몸부림을 칠 때 어려서부터 밥 대신 끼니를 때워 그래서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를 치던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기억상실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아 더더욱 가슴 아팠노라고. 나는 더 들을 수가 없었다.
휴가를 보내고 부대로 복귀하자 사람들은 내가 변한 것 같다 했다. 독하기만 했던 눈매가 누그러들었다는 거였다. 그랬다. 나는 다음 휴가 때까지 속죄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를 뵌 건 해가 바뀌고 난 뒤였다. 훌쩍 작아져 버려 속부터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가 내 눈 아래 있었고 선명해진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렇게 가슴을 난자해 놓고 집을 나간 아들이 뭐가 반가운지 두꺼운 돋보기 너머 눈시울이 그렁그렁했다. 그 선한 눈동자를 난 왜 보지 못했을까,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슥아, 와 이리 꼬질꼬질하노? 느그 엄마는 멋있다 카드마 다 그짓말 아이가. 목욕탕 같이 갈끼가?" 아버지는 내 등을 밀어주기엔 너무 작아 보였다. 등을 밀어 드리마고 때수건을 뺏듯이 받아 들며 움켜쥔 아버지의 손은 금방이라도 어릴 적 그 손님처럼 내 두 손에 후드득 동전을 떨어뜨릴 듯했다. 그 동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아버지의 두 손을 꼭 쥐다 그만 속죄의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