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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알약 Oct 06. 2024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대끼면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소크라테스, 공자, 붓다, 예수.


인류사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성인(聖人)이라 추앙하며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당대의 관념과 사상적 한계를 아득히 넘어 현대에까지 영혼의 등불로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성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습니다. 각자의 자아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드러내면 완전히 동일한 모양을 찾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제각각의 모습일 것입니다. 개인의 타고난 성향이, 살아가는 환경에 부대끼며 내면에 각인되는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니 이것을 자아의 고유한 문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험이 내면 깊숙이 침전되어 성향의 근방까지 도달하면 마침내 성품으로 발현하니 이를 영혼의 색채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의 품성이 내부요인과 외부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마치 분필처럼 무른 재질로 만들어진 조각이라는 상상으로 이어집니다. 커다란 그릇에 담겨있는 각양각색의 분필조각을 떠올려봅니다. 삶의 역동성은 그 그릇을 전후좌우로 흔들어대고 분필조각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색을 묻히고 묻혀집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가, 선한가를 따지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립은 이를 전제로 하는 논쟁입니다. 모두가 하얀색의 분필로 태어난다면 성선설인 것이고, 모두가 검은색의 분필로 세상에 나온다면 성악설이 될 것입니다. 이후의 삶에서 다른 색이 묻어 본성이 가려지니 그 과정을 교육이라는 제도하에 두어 긍정적인 색을 입히자(또는 유지시키자)는 것이 본성 논쟁의 실천적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익명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속내를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서로의 색을 거침없이 묻혀나가는 시대에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조흔색이 다른 사람에게 묻어날까 조심스럽습니다. 한편으로 원하지 않더라도 거칠고 어두운 분필과 부대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합니다.


아마도 현대적인 윤리관이 자리 잡기 전에는 더 어둡고, 더 거친 영혼들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거의 처음으로 밝은 가르침을 설파한 사람이 성인으로 불리는 사람일 테니까요. 말하자면 성인들이 부대끼던 영혼들은 거의 대부분 지금보다도 더 어두운 색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부대끼면서도 어떻게 그 밝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진정한 이유는 이것이 아닐지 생각하게 됩니다.


무수한 사람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 했으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 고립된 생활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오염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상황에서도 빛나는 그들의 성품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자정의 노력이거나 그 정도의 오염으로는 빛을 바라게 하지 못할 만큼 밝은 채도와 명도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거나.


온라인을 흘러가는 수많은 기사와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속내, 커뮤니티에 넘실거리는 무수한 색채의 향연을 보다 보면 어느새 성인들의 밝은 영혼에 경외감이 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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