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Epilogue가 되어야 했다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의 권유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던 적이 있습니다. 고등 영어, 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었는데 국어수업을 좀 해주면 안 되겠냐는 요청 때문이었죠. 대학 시절 과외를 했던 경험 이외에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없어 좀 머뭇거렸더니 친구의 하소연이 이어졌습니다. 학원생들이 설명을 알아듣는 능력이 떨어져서 수업 성취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이야기였네요. 결국 영어, 수학 수업을 위해서라도 국어 수업이 필요하다는 맥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주말을 같이 지내고 싶으니 핑계를 댄다고 생각해서 웃으며 넘겼지만, 몇 주에 걸친 하소연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쓴웃음을 짓고는 학원에 한 번 들르기로 했습니다. 새로 보는 얼굴 때문이었는지 수업의 참관인이 생긴 선생님의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의 학구열도 충분해 보였고, 선생님들의 강의도 훌륭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업을 재미있게 구성해서 속으로 놀래기도 했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학원 운영이라 국어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엔 국어 수업을 원하는 아이들의 면담을 받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네요. 면담을 기다리는 동안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순번대로 호출을 받으면 상담실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해서 직접 자습실로 데리러 갔는데 의외로 ‘깜지’를 쓰면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이 보여 신기했습니다.
암기해야 하는 내용을 종이에 빽빽하게 적어가며 까맣게 만든다는 것이 깜지작성형 공부법이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숙제로 제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 본 적이 없고 특히나 반복적인 쓰기가 효과적인 학습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깜지를 작성하며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깜지를 중심으로 화제를 확장하며 대화를 하다 보니 아이들이 공부법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혹감은 주말특강으로 개설된 공부방법에 대한 수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친구에게 보기 좋게 낚인 것이네요. 어차피 수업개설에 대한 필요성은 제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공부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전했을 것이니 학부모들의 요청이 이어져 주말특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상된 일이지만 강의실은 학생 반, 학부모 반으로 채워져 있더군요.
육상선수가 기록을 올리고 싶으면 주법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수영선수가 메달을 따고 싶으면 영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처럼 학습을 해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공부법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 아니냐 했더니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 해서 의외였습니다. 낚시꾼이 낚싯대를 채비하고, 요리사가 칼을 갈아두듯이 학생은 공부의 도구인 학습방법을 가다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육기간 중에 학습방법이 체화되는 것은 당연하고, 수능 국어영역에서 문학과 독서 파트를 문제풀이의 기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습방법 점검의 기회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죠. 즉 주어진 지문을 극히 짧은 시간 내에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풀이의 기법으로 접근하면 문제를 읽고 지문으로 올라가고 다음 문제를 보고 또 지문을 확인해야 하는 비효율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한 시간 내에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면 학습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이고 이를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시험에 임해서는 다듬어진 학습방법을 발휘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고요. 수학 능력을 테스트한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니까요. 대학에 진학하고 난 뒤에, 대학을 졸업하고 난 이후에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능력을 고등교육 기간에 쌓고 그 능력을 점검한다는 것이 수학능력시험 도입의 취지니까 말이죠.
그리고 일회성이었던 특강은 주말반 국어수업 개설로 이어졌습니다. 학부모들의 수업개설 요청에 일일이 거절하기가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학습방법의 실효성에 대한 기대로 수업이 개설된 만큼 국어수업은 이를 입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네요. 문제풀이를 암기하지 않고 지문을 즉시 학습해서 문제를 풀어내 보이는 식이죠. 즉 수업내용을 준비하지 않고 수업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능 기출문제집 중에서 아이들이 무작위로 불러주는 문제를 즉시 풀어 보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강에서 한 번 시연했더니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되기는 어렵다 했던가요. 방법을 전수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학습방법이란 결국 사고방법이기 때문이죠. 자신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왜 안 되는지를 알아야 기술의 전수가 가능한 것입니다. 육체 트레이닝은 피교육자의 수행과정이 보이기라도 하지만 두뇌 트레이닝은 그 과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하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인식의 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이었습니다.
‘인식의 틀’이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기본적인 인지 구조를 말합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보편적 인식방법으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인 학습의 핵심입니다. 특강에서 소개한 학습방법론은 결국 이 ‘인식의 틀’을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인식의 틀은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글은 단순한 학습 방법론의 소개는 아닙니다. 이는 학습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인지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앞으로의 시리즈에서는 ‘인식의 틀’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사고 방법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기반을 짚어나갈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AI 관련 기술의 등장으로 학습 양태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니다. 개인화된 학습, 실시간 피드백, 가상현실을 활용한 체험 학습 등이 가능해지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진보 속에서도 ‘사고하는 방법’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공지능 앞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효과적으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과의 상호작용능력이 우리의 핵심역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