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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Aug 03. 2024

아이들 성장을 제한하는 학교

- 교사가 보는 학교

* 학생의 신분에 맞는 신발을 착용한다.

* 가방은 자유로 하되 학생 신분에 맞는 것으로 한다.

* 두발은 항상 학생답게 단정히 한다.


내가 언젠가 근무했던 학교의 애매한 학생생활 규범들입니다. 아이들의 동아리 시간까지 빼가며 학생들의 용의복장에 대하여 교사들이 동그랗게 모여앉아 분임별 열띤 토론을 벌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이슈를 가지고 아직도 21세기에서 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교사들 스스로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이 애매한 규칙들을 가지고 아이들을 옭아 맵니다. 교사들이 모든 규칙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따르고 지키라고 요구하고, 교사들의 눈에 조금 거슬리면 제재를 가합니다. 수능이 끝나자 점심시간에 보는 3학년 아이들의 머리 색깔이 다양해집니다. 분명히 아직 이 학교의 학생일진대, 그렇다면 학교의 교칙에는 맞지 않는 모습일 텐데 누구도 이에 대하여 지도하지 않습니다. 참 모순된 현상입니다. 학생으로서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그 애매하면서 강력한 교칙이,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이들을 지적하며 짜증 나게 했던 절대 규범이 수능 끝난 3학년 아이들에게는 거의 강요되지 않습니다. 수능 끝나면 학생이 아니라는 얘긴가? 아니면 애초부터 쓸데없는 규범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도대체 아이들에게 강요했던 규범의 정확한 잣대가 무엇이고, 교사들은 무엇을 위해 아이들과 싸워가면서 교칙을 강요했던 것일까? 학교는 아직도 교사 중심이고, 학교의 모습은 미래의 사회구성원을 길러내기는 커녕 아직도 정확한 목적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단지 과거의 관행만을 쫓아 아이들을 통제하고 강제하느라 바둥거립니다. 학교 교육의 형식적인, 동시에 허구적인 또 다른 모습입니다. 교육 본연의 목적 추구에는 근접하지도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우리 교육의 현재 모습과 동일합니다. 


아직도 학교는 학업성취만을 지향하는 단순 획일적인 교육방식과 교육관만으로 일관하며 대부분의 아이들이 소외되고, 그로 인해 받고 있는 상처를 당연시하고, 내면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지금의 학교는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관리적 기능만 살아있는 중간 정거장으로서의 역할에 그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이들의 느끼는 정서적 괴리감을 보다듬고 치료하고자 하는 교육적 관심과 애정은 학교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표면적 관리나 학습 격차만을 걱정할 뿐 실제적으로는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나 정서적 격차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학습 격차에 의한 사회적 손실보다는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큰 불평 없이 열심히 잘 다녀주는 아이들을 보면 기특하면서 고맙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일방적이고 관리 위주의 학교 환경을 잘 버텨내지 못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면 가엽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지방에 내려와  비평준화 지역인지라 속칭 2류 학교로 불려지는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이 학교를 선택한 상위권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대부분 아이들의 겉모습만큼은 즐겁게 보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또한 실제적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명랑한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전에 근무했던 일반 학교들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보다 훨씬 밝아 보입니다. 또한 심한 경쟁을 격을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학업 자체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이들이 훨씬 여유롭게 보입니다. 친구들과의 어울림도 마치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듯이 자연스럽고 아이들 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교사들과의 마찰도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성적 한 점 한 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반 고등학교 아이들과의 살벌한듯한 마찰, 대립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연구에서 ‘고등학교는 사활을 건 전장이다’라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답한 반면 ‘함께하는 광장’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한 12%의 아이들이 이런 류의 아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철없는(?) 아이들로 보일지라도 아이들이 자신만의 꿈을 포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성적이 안되는 아이들이 굳이 성적이 연연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과 노력,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자신만의 재능을 바탕으로 즐겁게 탐색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 자발적 활동들(밴드, 동아리 활동 등)도 많고, 학교나 교사가 주도하는 모든 활동에 성의 있는 자세로, 그리고 즐겁게 참여합니다. 어쩌면 내가 간절히 바라보고 싶은 바대로만 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요. 내가 본 아주 단편적인 모습들만으로 비교해 보았지만, 학업에 대한 부담 여부에 따라 아이들의 정신적, 행동적 측면의 특성까지 읽어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학업에 대한 부담 대신 자신의 재능을 맘껏 추구하게 해줄 수 있는 학교가 우리 아이들을 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입시와 암기 위주 교육 등 획일적인 교과 교육 위주의 교육으로는 우리가 말하는 교육 본연의 목적 추구가 어렵습니다. 획일적인 교과 교육 위주의 교육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대로 재능을 발휘하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요? 국·영·수 과목 점수가 우수한 아이를 무조건 토론 능력이나 창의적 사고력도 뛰어난 아이라고 보거나, 또한 바람직한 인성을 소유하고 있는 아이라고 보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점수와 등수 같은 평가 패러다임만 고집하면 결코 아이들의 서로 다른 능력들을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압니다. 공부만이 중요한 기준이 아니라, 능력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능력이 달라 그냥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는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획일적인 교과교육 위주의 교육, 그리고 성적으로 줄세우기를 위한 평가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재능을 십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모두의 분야에서 1등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국영수 등의 교과성적 분야에서 1등 하지 못하면 1등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는 교육이 아니라 교과성적이라는 한 분야에서의 1등보다 잘해야 하는 교육에서는 성공하는 극히 일부 학생들 말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루저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물고기를 나무에 오르는 능력만으로 평가한다면 평생 그 물고기는 멍청한 루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이라는 책에서 벼룩 스스로 높이를 제한하는 상황을 언급합니다. 80배의 높이를 점프할 수 있다고 하는 벼룩을 유리병 안에 24시간 가둬둡니다. 벼룩들은 톡톡 튀어 올라 유리병 뚜껑에 부딪치다가 자꾸 부딪쳐서 아프니까 뚜껑 바로 밑까지만 올라가도록 스스로 조절합니다. 하루가 지난 후 병뚜껑을 열어놔도 모두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는 높이까지만 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맞춰 크기가 성장하는 물고기 코이(잉어를 뜻하는 일본어)와 같은 맥락의 의미입니다. 코이는 작은 어항에서 기르면 5-8cm로 자라고, 강물에서는 90-120c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코이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입시에 갇혀있는 교육,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말하는 듯합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교육은 이를 개발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사람들의 얼굴을 각기 다르게 만든 이유는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세상에 각자 다르게 쓰임이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듯이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 역시 다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현대 교육심리학자 가드너(H. Gardner)가 주장한 다중지능 이론과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7가지 이상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중 최소한 어느 아이건 2-3개의 뛰어난 능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각 학교들마다 다양한 교육활동들을 통하여 아이들의 잠재적 재능을 개발하는데  주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모든 교육자들이, 교육 정책가들이 다 알만한 사실일텐데 입시, 특히 수능이라는 외적 평가체제를 학교교육에 몇 십 년 동안 강요하고 있는 이유를 현장 교사로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가끔 아이들, 더 나아가 미래의 사회적 구성원들의 맹목적 무지를 강화, 또는 유지하기 위하여 지금의 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아이들이 걱정도 되고, 때로는 자신들을 합리화해가면서 왜곡된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는 일부 아이들에게도 지치면서 우려되는 마음이 더욱 커져가는 현실입니다. 수능과 학종을 몇 %로 하는 것이 좋으니 하는 무의미한 논쟁을 일삼는 것보다는, 80배를 띨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의 개인적 잠재력을 입시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억제, 퇴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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