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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Aug 04. 2024

빛 좋은 개살구

- 교사가 보는 학교

‘괜찮아요. 나야 머 입시 스펙을 쌓기 위해 해온 거니까 내가 필요한 것만 하고 빠지면 돼요.’


학생회 업무를 새로 맡은 담당 교사가 학생회 아이들을 제대로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는 불만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를 찾아온 학생회 아이에게 잘하고 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돌아온 대답입니다. 아주 당연하듯이, 하지만 살짝 민망해하며 내뱉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집니다. 제대로 해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물었던 것인데 아이 나름대로 제대로(?) 대처하고 있다는 대답입니다. 어쩌면 모든 아이들이 감히 내뱉지는 못하고 있지만 당연히 갖고 있는 마음속 진실을 이 아이가 대신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학교는, 그리고 교육적인 교사들은 나름 아이들을 위해서 많고 다양한 활동들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들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생기부를 채우기 위한 활동들로 인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 뿐입니다. 아이들의 생기부에 적힌 많은 활동들, 정말로 그 활동들을 통하여 진실한 배움을 얻어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교사들의 교육적인 의도와는 달리 아이들의 속마음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계산하며 일관되게 맞춰가고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같은 틀 안에 있지만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학교와 교사들과는 별개로 따로 놀고 있습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학교 안에서 아이들 나름대로 입시라는 최종 목표를 향한 생존전략을 터득하며 잘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 해봅니다. 


'샘 도와드릴까요?'

'1학년 2반 00번, 00번입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마침 지나가는 아이들이 기특하게 도와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바로 이어서 아주 당연하듯이 자신들의 학번을 말합니다. 놀라는 내가 더 이상할 뿐입니다. 좋게 생각하면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것보다는 도와주려고 하니 기특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혹 샘에게 잘 보임으로써 생기부 기록이든 뭐든 얻어걸리는 이득을 생각한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아이들의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그나마 이런 류의 아이들은 그래도 염치를 알면서 조심스럽게 이득을 취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다행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활동 좀 해보려고, 도움을 청하려고 하다 보면 ‘가산점 있나요, 생기부에 써주나요, 봉사활동 점수 있나요, 머 있나요...’ 등을 요구하는 아이들에 이미 익숙해진 상태인지라 그렇습니다. 


앞에서 비평준화 지역의 속칭 2류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당연히 학업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채워져있어야 하는 학교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전에 있던 학교(속칭 이 지역의 명문학교였습니다)의 학생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명문학교를 갈 수 있는 우수한 학생들 일부가 전략적으로 지금의 학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즉, 현재 입시에서 내신(학교 성적)이 중요하다 보니 우수 학생들이 자신들이 갈 수 있는 명문학교에 가서 내신 따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희생양(?)이 되어줄 학생들이 많은 지금의 학교를 선택하여 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라는 간판이 중요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이들에게는 고등학교 간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성적을 가장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느냐가 가장 초미의 관심사일 뿐입니다. 최고의 성적을 획득하여 단지 얼마나 수월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느냐에 모든 선택의 초점이 모아집니다. 자신의 진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략전 선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사전에 습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어촌 특별전형 혜택을 지원하기 위해 일부러 농어촌으로 이사하거나 주소를 옮기는 꼴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에게 지금의 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하다못해 수업 끝나고 질문하러 쫓아내려오는 아이들에게도 ‘과연 진심일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수업내용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질문하는 학습 자세, 교사들이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일진대, 한편으로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킴으로써 혹 나중에 생활기록부 교과 특기란에 득이 되는 기록을 기대하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자신의 이익(점수, 성적)을 위하여 고전분투하는 아이들로 커가는 모습만 각인이 되어서 그런지 나의 시각도 자꾸 왜곡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동안 매 순간 다양하고 유익한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성장을 해야 하는 학교에서, 오히려 매 순간을 희생하며 오직 입시에서의 성취만을 목표로 쫓기듯이 달려가는 학창 시절이 되고 있습니다. 성장이 아닌 오직 성취, 즉 결과만을 위한 수단적인 과정으로 학창 시절이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시제도와 왜곡된 학교에 맞추기 위해 우리 아이들은 영악한 이익 우선적 전략가로 왜곡된 성장을 할 수밖에 없는 웃픈 현실입니다. 



‘줄 서~ 간격 맞추고.’


코로나 시기의 점심 식사시간. 급식실 입구에서는 밀려들어오는 아이들을 줄 세우고, 간격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교사들의 고성이 쩌렁쩌렁 학교를 울립니다. 아이들이나 교사들 모두 코로나 사태의 긴장된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매우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 학교의 모습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급식실 질서 지도는 항상 하고 있고, 특히 코로나 시국을 대처하기 위한 당연한 모습일진대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 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우리 학교교육의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뜩함이 전해옵니다.


교사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모양새는 그럴싸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실속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미 아이들은 교실에서, 복도에서 뒤엉켜 어울려 왔는데 급식실 앞에서만 줄을 세우고, 간격을 띠우라고 소리칩니다. 이미 망가진 상태인데, 교사들은 목청을 높여가며 최선을 다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최선으로 보입니다. 교사들도 이미 망가진 상태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진데 쏟아진 물을 조금이나마 주워 담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니면 그냥 질서 지도 당번 교사인 나에게 주어진 의무이니 아무 생각 없이 최소한의 생색만을 내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합니다. 식사를 마친 교장, 교감도 그 모습이 무용(無用) 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리자로서의 적절한 지도, 조언은 없습니다. 이미 망쳐진 것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만이 학교에서 교사들이 적절한 교육 활동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테고, 관리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만약의 경우...’를 대처할 수 있는 책임 면피용 활동이라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도 교사들의 지도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무시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교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무의식적 반사 행동에 익숙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지도를 무시해 봤자 자신에게도 도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저 ‘무사유’로 일단 교사의 지시에는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이미 아이들은 왜곡된 성장을 당연시하고 있는데 그 틀을 깨지 못하면서 학교는 포장만 그럴싸하게 하고 있고, 교사들은 이를 위해 바둥거려야 합니다. 이처럼 내 눈에는 학교에 던져지거나 실행되고 있는 정책들이 왜 이렇게 ‘호들갑’으로 보이고 ‘탁상공론’으로, 심지어는 ‘거짓’으로까지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육은 서류상으로는, 외형상으로는 번드르르합니다. 외형상으로, 그리고 서류로만 보면 우리 교육은 완벽합니다. 아이들의 생각 없이 순응적인 모습에서, 교사들의 최선을 다하지만 무의미한 지도 행위에서, 교사들의 지도행위에 책임 면피용으로 만족하는 관리자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무의미한 활동들에 서류상으로 완벽함으로 요구하고 조장하는 교육청의 역할 등 이미 망가진 상태를 형식적으로나마 번드르르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우리 교육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코로나 비상시국에 어쩌라는 것이냐 하겠지만 당연한 모습 속에서 우리 학교교육의 의례적이고 가식적인 실태가 보이는듯하여 씁쓸했습니다. 교육답지 못한 교육으로 이미 망가진 상태에서 교사들은 표면적으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둥거리고, 관리자나 교육청은 이미 망가진 상태를 어떻게든 표시 안 나게 하려고 바둥거립니다. 역시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역으로 표면적인 완벽함을 위해 낭비하는 교사들의 에너지로 인해 정작 아이들 지도와 수업에 전력투구해도 모자랄 교사들의 에너지가 무의미한 방향으로 줄줄 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학교에서는, 그리고 교사들은 거기에 장단을 맞추며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미 입시라는 틀로 인해 교육의 목적성이 왜곡되고 변질되어버린 상태에서 이리저리 던져지는 단기적 실행책이나 정책들에 대처하기 위해 교사들은 바둥거려봅니다. 하지만 교육 본연의 추구라는 내실 대신 겉모습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위하여 무의미한 에너지 낭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을 둘러싼 학교 내·외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교사들은 흔들리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잘못 성장하여 교사의 본질인 수업연구나 아이들 지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학교가 즐거워야 교육 활동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판단 아래 책가방 없는 날, 알뜰시장, 장기자랑, 그리고 교수학습 측면에서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기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즐거운 학교 만들기에 주력하였던 대전의 한 중학교 교장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장 선생님이 발견한 가장 큰 어려움 점은 교사들이나 학생들 모두가 즐거움을 누릴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채 피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답니다. 잡무에 시달리는 교사들은 그렇다 치지만 아이들까지도 중학교 생활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점에서 나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아이들인데도 말입니다. 아이들도 잘못된 교육의 희생양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등학교에 올라온 아이들은 왜곡된 학교교육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영악함만을 더해가며 성장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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