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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Sep 04. 2024

교육적 소신을 갖추자

- 교사부터 변하자 

선생님들께 민망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동료 선생님들이 심혈을 기울여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는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민폐인지, 잘 알면서도 좁은 소견 하나 올립니다. 고민과 논의의 시간만큼 우리들의 교육적 시야도 넓어지고 깊어지리란 믿음 하나로 민폐를 무릅쓰고...


올해 교복 단속에 대하여 우리 교사들은 너무 관습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야 ‘교복 자율화’, ‘교복, 헤어스타일과 관련된 생활규정(헌법이 보장한 인권 침해 소지)을 없애자’라는 견해나 규정의 수정... 등이 현재의 지배적인 시류인데, 왜 우리 학교는 교복 지도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둔 생활지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너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지금은 교복을 단속하기보다는 아이들이 교복을 입지 않는/ 입지 못하는 이유에 귀 기울이고, 어려워하는 지점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생활지도의 물꼬를 터야 할 때가 아닐까요? 

특히 담임들에겐, 수업 준비와 조회 준비로 두 배로 바쁜 아침 시간을, 아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데 온전히 쓰게 해야 합니다. 또 밤 10시, 11시까지 야자 지도를 하고 퇴근하는 담임 샘들의 경우, 7시 50분까지 와서 일하라는 것도 매우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규제보다는 긍정적이고 즐거운 학교문화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즐거운 등굣길’ 아침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자 한다면, 비담임인 저는 개인적으로, 1학기 때 했던 것보다 10배의 수고를 더해서라도 자발적으로 적극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선생님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게 민망하고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혹, 동의하신다면 동료 선생님들께서 생각과 논의를 함께 발전시켜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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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기는 학교마다 매번 반복되는 교복 문제입니다. 30여년을 따라 다닙니다. 교복을 안 입으면 학교가 망한다는 관리자까지도 있으니 교사들 간 말이 많을 수밖에요. 이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육적 활동에 관한 교사의 교육적 소신, 철학이나 수준 등이 중구난방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부장회의에서 결정된 엄격한 교복 단속 안에 대하여 한 의욕적이고 교육적인 교사가 말 그대로 시대를 열심히 역행하고 있는 결정을 참다못해 전체 교사에게 날린, 아주 조심스러운, 그러나 강경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입니다. 당연히 교장의 의중이 반영된 교복단속이겠지만 부장회의에서도 아무 이견 없이 순순히 통과된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의례적이거나 교육적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활동에 교사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지말고 제발 교사의 에너지를 보다 바람직하고 교육적인 것에 쏟게 해달라는 교사의 간절한 울부짖음입니다. 내가 학교현장에서 가장 안타깝다고 보고있는 '교사 에너지의 낭비'와 같은 주장입니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교육을 책임진다는 교육적 당위성마저 확보하지 못한 채 그저 관리적 기능 위주로 흘러가는 학교와 교사들에 대한 간절한 하소연일 것입니다.


 나는 가끔 관리적 성향의 동료 교사들과 논쟁할 때 기업의 목적, 즉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바로 ‘이익 추구’라는 답변이 나옵니다. 그러면 다시 교육, 더 구체적으로 학교의 목적은?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교사들이 의외로 머뭇거리거나 명확한 답변을 주지 못합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교사의 존재 이유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망각하고 있음입니다. 입시에 쫓겨, 아니면 학교의 관리적 분위기에 매몰되어 교사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새겨볼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양대 국어교육과 정재찬 교수의 표현을 빌면 자신의 업(業)에만 몸을 담그고 그저 의례적으로 일을 할 뿐, ‘업(業)의 본질’은 아예 인식하지  못하거나,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꼴입니다.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일터라면, 학교는 ‘교육’을 추구하는 일터입니다. 다른 직장인도 같은 경우이겠지만, 특히 교사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존재 이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교육적’이라는 기준을 우선으로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하는 ‘업(業)의 본질’에 대한 인식입니다. 나는 이를 ‘교육적 소신’이라고 합니다. 교사들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도 정치적 소신이 아닌 교육적 소신의 발로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교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교육적 소신의 결과입니다.


혹자는 우리 교육을 '안 받느니 못한' 교육이라고까지 합니다. 교육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교육을 '안 받느니 못한'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나도 자주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지금 같은 교육제도 하에서는 실제 교육을 안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에 ‘안 받느니 못한' 교육이라는 비판에 무조건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학교 현장의 교사로서 오랫동안 근무해온 나의 입장에서 기꺼이 100% 동의할 수는 없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홀로 외롭게 오직 아이들만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능력 있고 진실한 교사들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교육적 소신'으로 무장한 교사들입니다. 이러한 교사들이 한 학교 단위 당 최소한 20~30 % 정도는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곡된 교육제도 틀 속에서, 입시제도에 끌려다니며 파행으로 치닫는 학교교육 속에서, 그리고 잘못된 교육제도에서 뒤틀리고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는 아이들만을 위하여 한 아이라도 더 살려 보려는 듯 고민과 고생을 자초하며 교육 본연의 모습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입니다. 실제로도 내가 경험한 바도 교육적 마인드로 무장된 교사들이 아이들의 전면적 성장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제대로 가르쳐 보려고 연구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버팀목에 되어주는 덕분에 비틀어진 교육 제도와 왜곡된 교육과정 속에서도 다행히 일부 아이들이지만 밝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이런 교사들 덕분에 내가 '안 받느니 못한' 교육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핀란드 교육의 근간에도 능력뿐만 아니라  확고한 교육적 의식과 열정으로 가득 찬 교사들이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핀란드 교육을 책임진다는 강한 교육적 의식과 사명감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사가 ‘교육적’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고 유념하면서 학교 현장에 임하느냐, 인지하지 못하고 임하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교사다움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더 나아가 교사 수준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교사의 우선적인 자질로 이러한 교육철학적 관점을 강조하는 이유도 교사의 교육관, 즉 교사가 교육 활동 전반에 관하여 소유하고 있는 철학과 교육 활동에 임하는 관점, 자세에 따라 가장 중요한 아이들과의 관계 형성이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 아이들에 대한 교육내용과 교수방법, 그리고 교육 활동의 과정 및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 현장에서는 교사 연륜이 쌓일수록 교사로서 하는 일들을 보면 교육다운 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만 합니다. 


물론 교사를 옥죄거나 교사다움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많습니다. 동시에 현행 교사들과 연결된 기관이나 교육 제도들은 교사들을 지시받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도록 요구하는, 아무 의식 없이 단순한 길로 선택하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의식이나 교육철학 등을 망각하며 지내기 일상입니다. 더불어 수업, 아이들 생활지도, 업무, 연수, 행사 등등. 아이들과 함께 하면 하루에도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이 엄청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업무, 의례적인 서류 작업, 무의미한 연수, 지시, 행사 등이 수시로 치고 들어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듭니다. '교육적'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일일이 따지고 고민하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됩니다. 이에 교사들 스스로도 자신이 행하는 교육 활동들이 교육적인지 아닌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굳이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단지 주어진 업무와 지시에 순종하며 그때그때 대처해 나가는 무사유의 자동화가 이미 내재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부적 요인들이 있다고 해서 학교와 교사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모두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안일하게 제도나 여건만을 탓하기 전에 교사 스스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만약 노력했다면 그 노력의 방향과 가치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교육적인 잣대로 재단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교육의 가장 위대한 힘은 세대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세대변화는 전적으로 교사에게 달려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사의 확고한 ‘교육적 소신’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규정이나 법, 행정보다는 ‘교육적’이라는 목적과 기준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시민 불복종을 강조한 데이비드 소로우(H. D. Thoreau)가 한 사회 안에서 ‘법 보다 정의’라는 개념을 강조한 것에 비유한다면,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는 법이나 규정보다는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암기할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것보다 올바른 가치관과 교육철학을 지닌 교사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즉, 입시에 쫓기고 성적 지상주의에 메말라가며 무너지는 아이들을 위하여 먼저 교육 본연의 모습을 고수하고자 하는 철저한 소명의식이나 교육적 사유, 교사와 학생 간의 가르치는 관계 형성을 위한 인간적 자세를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위에서 읍소하고 있는 교사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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