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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Sep 14. 2024

관리적 관점을 지양하자 2

- 교사부터 변하자

‘아이들이 왜 그런 염색이나 액세서리 등을 하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모두 금지해야 합니다.’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일터인 것처럼, 학교는 ‘교육’을 추구하는 일터라고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학교에서의 교육은 철저히 교육받는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질 함양에 우선적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아이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충족해 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적인 성장을 이끌어내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육철학자 존 듀이(J. Dewey)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과 행하는 모든 교육 활동은 ‘성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리고 아이들의 자기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관리주의적 교사들에게는 이러한 인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인간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학교 교육이 아이들을 규제 대상으로 봄으로써 교육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고 흘러갑니다. 


우리 학교에는 아이들을 단지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상대하고자 하는, ‘관리적’ 성향으로 충만한 교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긴 최근에도 고3의 여학생 아이들을 의자 위로 올라가라 해놓고 치마를 들추고, 치마 길이를 재고 있다는 학교가 있을 정도이니 할 말이 없습니다. 상담부에 배치된 교사가 아이들이 엉망이라 말이 안통한다며 힉생부에 처벌을 요구하는 형국입니다. 심지어 어느 학교에서 아이의 자습 자세를 지적한 교사가 끝까지 물고 늘어져 교칙 위반으로 넘겼다는 사례까지 상기되면서 무엇을 위한 '관리'인지 교사 조차도 의아하게 만듭니다. 


아마 지나치게 엄격한 규정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하여 누군가는 ‘그럼 도대체 아이들 관리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투덜대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아이들은 일방적 규정들을 핑계 삼아, 또는 학생보다 우위적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폭력을 휘두르며 괴롭히는 교사들을 '꼰대'라 비아냥거립니다. 결국 이미 아이들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상태에서 교사와 아이들 간의 신뢰 형성은 물 건너가고, 가식적이고 의례적인 관계만 겨우 유지됩니다. 아직도 아이들에 대한 전근대적, 비교육적 관념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통제적, 관리적 관행을 고수하고자 하는 학교, 그리고 교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한 이 현상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학교들에서는 당연한 현상을 내가 왜 의아하게 생각하는지는 미국학교 아이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한 중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의 일과를 하루 종일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아침 등굣길 복장이 다양합니다. 슬리퍼 신고 오는 아이들, 하다못해 잠옷 바지 그대로 입고 오는 아이들, 머리 염색은 기본에 혓바닥까지 각종 피어싱 등 아마 우리 교사들이 봤으면 까무러칠 그런 자유로움입니다. 나 조차도 이런 아이들이 수업은 제대로 받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기우였습니다. 15명 남짓한 교실에서 딴짓할 틈도 없이 아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사와 아이들 간 상호작용이 수시로 오가는 교실이었습니다.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만으로 일관하는 수업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현상은 오후 조회 때 벌어집니다. 우리들처럼 각 반별 순서대로 집합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친한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원하는 곳에 앉고, 교사의 제지도 없으니 엄청 시끄럽습니다. 여기에 우리처럼 조용히 하라, 제대로 줄 서라 등 교장이 오기전에 나서서 지도하는 교사 조차 없습니다. 과연 조회 시작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시끄럽습니다. 역시 기우였습니다. 단상에 교장선생님과 학생회장도 같이 앉습니다. 담당교사가 주변 정리를 다 마치고 마이크를 두드리며 조회 시작을 알립니다. 그렇게 시끄럽게 친구들과 떠들던 아이들이 마이크를 두드리자마자 조용해지기 시작하더니 '조회 시작합니다'라는 말과 거의 동시에 말 그대로 ‘갑자기’ 조용해집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날의 메인 행사인 시상식 상황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됩니다. 상을 받는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자 알고 있는 급우가 아님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모든 아이들이 엄청난 박수와 환호성을 보여줍니다. 환호성이 한참 이어지지만 다른 아이를 부르기 전에 다시 급 조용해집니다. 조금 늦게까지 환호를 하는 아이들에게 여지없이 다른 친구가 조용히 하자는 소리를 합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절도 있게 소리를 멈추는지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는 소리가 강당 반대편 구석에 앉아있었던 나에게까지 들려옵니다. 교사들이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을 부르짖고 쫓아가 주의를 주어야만이 겨우 정리가 되었던 우리의 조회 장면이나 교실 장면에 익숙해있던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엄청난 박수와 환호 속에서도 아무런 지체 없이 부드럽게 조회가 진행됩니다. 지도 교수로부터 특정 교사를 소개받아 개인적인 수업관찰을 위해 방문한 학교이었기에 외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에도 보여준 아이들의 행동이었습니다. 


그 망나니(?) 같던 아이들이 평소 학교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누려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개인적인 자유는 최대한 인정해 주되 공공의 질서나 타인들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철저히 각인시켜주는, 내가 바라던 교육의 정석을 보여주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 (J. S. Mill)이 말한 자유론의 정수를 보여주었던 장면입니다. 우리처럼 외형적인 관리에 치중하는 겉만 번드르르한 학교교육이 아니라 보다 교육 지향적이고 내실 있는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학교의 교육적 기능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일깨워 주었던 멋진 관람이었습니다. 우리처럼 외형적인 측면에 한정된 관리, 즉 감독과 지시, 통제로 일관하는 훈육은 감시, 통제가 있을  때 그때뿐입니다. 외부적 압력에 의한 일시적, 비자발적 순응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강압적인 힘이 작동할 때에만 길들여지는 기회주의적 인간을 양성하게 됩니다. 미래적, 지속적, 교육적 기능보다는 일시적, 외형적, 관리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우리 학교의 폐해입니다. 미국 학교의 관찰은 의도적인 ‘관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을 하면 관리도 가능할 수 있음을 입증해 주었던 경험이었습니다. 


단지 교칙이나 규정, 그것도 구시대적, 혹은 반교육적 인식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는 규준을 교육적 당위성없이 마치 절대적인 가치인 양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을 소위 ‘파시즘적 폭력’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조차 그럴싸하고 합리화된 규정, 즉 외적 장치에 의한 감시, 감독 등 규율 권력을 당연하듯이 내면화하고 있다는 미셀 푸코 (M. P. Foucault)의 경고와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에서 ‘교육적 배려’는 뒷전이고, 엄격한 행정적 기준, 절차가 우선시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다수의 관리적 유형의 교사들에 의해 학교교육의 방향이 형성되어 나가는 상황에서 더욱 유념해야할 경고일 것입니다. 




교사들 무리는 교사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에 의해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교사에게 부여된 관료적이고 행정 위주의 현재의 교육 여건이나 제약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이들에까지 기존의 권위주의적 교육 행태를 과감히 행사하고 순순히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다른 하나는 보다 교육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학교 교육을 조명함으로써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무리들입니다. 교육적 가치와 관리적 가치, 학교교육 활동에 관한 교사들 간의 갈등과 대립 대부분이 이러한 교육적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교직 생활 내내 이 양 극단적 가치관을 소유한 교사들은 갈등, 대립합니다. 즉, ‘관리 지향적’ 교사와 ‘교육 지향적’ 교사들과의 갈등입니다. 


이처럼 교직사회 내에서 모든 교육 활동에 대한 교사 간 갈등과 반목은 표면적인 대립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내에서의 모든 학생활동에 지대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도 교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대상은 아이들도 아니요 관리자도 아니요 단지 바로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교육활동해야 하는, 하지만 다른 교육적 관점을 가진 동료 교사들이었습니다. 여기에 교육적 철학이 없거나 아예 다른 관점, 즉 행정적 관점이나 관리적 관점으로 교육 활동을 바라보는 교사들과 대화는 너무 어렵습니다. 교육이라는 한 가지 목표하에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진 교사들이 어울려 지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특히 앞의 사례처럼 학생생활과 관련된 교사들 간의 갈등에서 관리적 관점으로 무장한 강경한 교사와 의견 조율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교육이 아닌 훈육과 강압에 아이들은 학교에서 인간적인 성장 대신 교사에 대한 억감정을 갖게 되고, 일방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학교와 교사들로 인하여 고통을 느낍니다.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은 뇌의 같은 부위에서 통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신체적으로 다치고 아파서 피를 흘리며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면 몸이 다친 것처럼 동일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 현장에서도 일상화되어있는 교사와 아이들의 갈등을 대립각으로 설정하고 강압, 통제, 처벌 위주의 접근만을 제시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학교와 교사들에 의한 무의식적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객만족으로 유명한 미국의 노드스트롬(Nordstrom) 백화점은 단지 한 페이지의 규정집을 직원들에게 제공한다 합니다. 그리고 잡다한 규정들보다도 아래처럼 단지 고객에게만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사들도 그저 ‘무엇이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적인가’라는 기준만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게 나의 단순한 생각입니다. 


우리 회사의 목표는 바로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하시는 대로 행동하세요.

다른 규칙은 없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노드스트롬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바로 종업원 스스로

각자의 기준을 갖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판단의 기준은 바로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있습니다.


- ‘친절은 이자까지 붙어 되돌아온다’(에드호렐 저, 전창준 옮김, 200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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