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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Jul 31. 2024

차별때문에 학교가기 싫어요

- 아이들이 바라보는 학교

‘사회에 나가서 받을 차별을 이미 학교에서 다 받아버리니까 학교에 가기 싫어요. 그런 특혜에 대해 나머지 아이들이 동의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 속으로 자존심 많이 상하죠.’ 


‘소수의 학생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다른 학생들은 챙겨주지도 않아요.’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모 방송국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사실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 느껴야 하는 차별을 학교에서 느끼고 감수하고 있으며, 학교라는 교육기관은 아이들이 사회 나가기 전 능력별 차별을 공공연하게 인지하게 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역할을 의도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나머지 아이들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아니 교사들을 귀찮게 하는 존재들로 취급받지 아니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담임들 말고는 3학년 교실에 수업 들어가는 대부분의 교과 교사들도 나머지 아이들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네들도 아무 소리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목소리 낸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저 당연히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나에게 자기소개서를 봐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도 ‘시원찮은 대학 가면서 귀찮게 해드려 죄송해요.’라는 민망함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점수, 성적은 단지 학업적 성취 기준만이 아닌 능력, 더 나아가 인격적 대우를 받는 잣대로 인지되어 있습니다. 점수 자체의 본질적 의미보다 점수의 도구적 가치가 더욱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와 교사가 공공연하게 성적에 다른 차별적 대우를 자행함으로써 그렇게 적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사들도 은연중에 고등학교에서는 관행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모습인지라 아이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만큼 우리 학교에서의 성적에 의한 차별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당연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입시 진학 성적이 곧바로 그 학교의 우수성 평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학교평가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잣대가 학교에 들이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등학교의 압도적인 초점은 ‘내 아이를 한 명이라도 대학에, 나아가 SKY 대학에 더 많은 학생을’에 맞춰져 있는 형국입니다. SKY 대학에 몇 명 갔느냐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현실적으로 SKY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을 밀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듯이 성적에 따른 차별을 묵시적으로 공식화하여 각 고등학교에 특별반은 당연하게 존재하고요, 성적순으로 기숙사 입사 자격을 부여하고, 외부 강사를 불러서 따로 특강을 베풀어주고, 수시 대비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더 나아가 성적이 좋은 아이들만 이용할 수 있는 특별실이 있고, 상위권 아이들이 밥을 먼저 먹게 하는 조치가 이루어지는 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지역별로 몇 개 학교가 뭉쳐 우수 학생들을 선발하여 각 학교의 우수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생활기록부 기록 수정이나 성적 봐주기 의혹 등도 자행됩니다. 교장의 지시로 우수 학생들의 학생부 내용을 수정하거나 수행평가 점수를 좋게 만들기 위해 따로 불러 수행평가 과제 결과물을 고치라고 하는 학교도 있다 합니다. 


‘나의 최고 관심은 입시 성적입니다!’


내가 같이 근무했던 교감의 말입니다. 이처럼 아마 대부분의 교장, 교감들도 입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차별적 대우와 조작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도록 끌려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선 교육감들도 한몫 거드는가 봅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지역의 고등학교 교장들에게 은근히 상위권 대학, 특히 서울대 합격에 대한 열망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지방에 내려와서 교장을 하는 친구에 의하면 전에는 매년 전년도 주요 대학 진학 성적을 앞에 놓고 도내의 각 고등학교장들과 일대일 교육감 면담까지 했었다 합니다. 지금도 어떤 방식으로든 교육감, 교육청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상황일 것입니다. 아마 민선 교육감이기에 도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주요 대학 진학 결과를 내세우는 듯합니다.  


핀란드는 학업에 뒤처진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차별 대우해 준다는데 우리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차별 대우해 줍니다.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J. Rawls)가 보았다면 한탄할 일입니다.  존 롤스는 사회에서 조차 사회적 약자들에게 차별적 혜택을 우선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데 정작 교육을 한다는 학교에서 오히려 우월한 아이들에게 우선적인 혜택을 베풀고 있는 실정입니다. 꿈과 희망을 키워나가는 장소인 학교가 오히려 차별을 느끼고 상대적 열등감을 갖게 하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학교는 교육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학교라는 작은 사회가 오히려 차별을 공식화하고 당연시하며 비정상의 내면화를 가속화하고, 결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면서 교실에서는 국가 간 차별, 인종 간 차별, 계층 간 차별, 남녀 간 차별 등을 하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여 교육합니다. 참 웃픈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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