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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Aug 02. 2024

자퇴하고 싶어요..

- 아이들이 바라보는 학교

‘샘, 저 자퇴하고 싶어요. 배우는 것도 그렇고......’

 

수업이 끝난 후 교실을 나가는 나에게 슬쩍 다가온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자퇴하는 아이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남의 학교 이야기인 듯했었고, 한편으로는 어떤 아이들일까 궁금해했었는데 정작 내가 가르치는 아이가 자퇴한다고 다가오니 당황스럽습니다. 당연히 말려야 했지만, 그리고 말릴 수도 있었지만 바로 적절한 조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름 성적도 최상위권에 속하고, 나의 토론 수업에서도 수업을 리드할 정도의 상당히 적극적이면서 그만한 능력을 보이고 있는 아이인지라 더욱 그러했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시험만을 위한 고리타분한 교과서 수업에도 지쳤고, 교과서 위주의 학습은 혼자 해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고, 입시 성과를 위해 학교에서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도 많고, 이에 따라 해야 할 것들도 많고... 그러면서 학교와 교사들은 무언가 신선함이 없이 구시대적 학교 운영방식에 젖어 행하는 관리 지향적 행태들 이것저것에 부당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학교의 상위권 아이이면서 친구들과 즐겁고 여유 있는 고등학교 생활을 누려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인지라 더 큰 괴리감을 느끼는가 봅니다. 

 

그나마 이 아이는 뒤로 처져 나가떨어진 경우가 아닌 능히 버틸 수 있는 아이인지라 설득 아닌 설득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학교에서 이 밖의 이유로 멀어져 가는 나머지 아이들은 더욱 심각합니다. 더 심하게 표현하면 아이들이 교실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직접 자퇴를 한다는 아이를 접해보니 더욱 실감이 납니다. 

 

중학교 때 전교 1,2등을 하던 아들이 학교생활에 지쳤다며 고등학교 올라가자마자 자퇴를 하려 한다고 한숨만 내쉬던 동료 교사가 떠오릅니다. 결국 이 동료의 아들도 고등학교 1학년을 버티지 못하고 자퇴를 한 후 짜장면 배달도 하고, 집에서 게임에 빠지기도 하면서 몇 년을 소비(?) 하다 그제야 마음이 돌아섰는지 검정고시를 통하여 대학 진학을 했다 합니다. 이 동료의 아들도 다음과 같은 인식 때문 아니었을까요? 대학에 들어가는 동시에 잊혀 버릴 무의미한 지식과 암기 위주의 교육, 경쟁 관계가 되어 버린 친구들, 그로 인한 학교 폭력, 사회와 동떨어진 학교 분위기, 개인적 재능과 가치를 추구할 수 없는 학교생활에 아마 최상위권 성적을 가진 이 아이도 진력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런 문제점들을 느끼고, 겨우 버티고 있거나,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친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옛날에 게보린 과다 복용이 학교에 가지 않거나 조퇴하는 방법으로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히 유포되고 있다는 기사까지 뜬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수준과 입장에 따라 학교를, 배움을 멀리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하는 것은 동일한 현상입니다. 배움의 낙이 없고, 학교 다니는 낙이 없는 아이들, 이것이 오늘 우리 학교의 실태입니다. 수업을 들어가 봐도 집중하는 학생은 반도 안 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각자 자기만의 세상을 즐깁니다. 생존경쟁에 살아남기 위해서 버티는 아이들은 시험 위주의 수업에 필요한 내용들을 이미 학원에서 다 배워왔고, 어차피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은 수업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교과서 위주의 수업을 반복하고 있고, 학교는 일부 수업을 따라오는 아이들에 만족하며 기존의 프레임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정해진 틀 내에서 쫓아오고 버티라는 강요만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당위적이지 못한, 그리고 비교육적인 잣대로 아이들의 성장을 재단하고 왜곡시키는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저 못 쫓아오는 아이들, 아니 안 쫓아오는 아이들 탓만 합니다. 학교 스스로 부적응 아이들을 양산하는 꼴이면서 우리 사회는 이런 과정을 쫓아오지 못하고 뒤처지는 아이들, 그리고 안 쫓아오는 아이들에게 ‘학교 부적응아’라는 낙인을 찍어주고 더욱 차별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학교 부적응이란 개념도 못마땅합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시키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학교 부적응이란 아이들이 마땅히 적응해야 하는 환경, 즉 학교라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학교 부적응이라는 현상이 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현재 우리의 학교 모습이 잘못되어 적응을 못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 학교가 정상인데도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학교에 소속된 교사로서, 아이들의 생활을 같이 하고 있는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적응을 강요할 수 있을 정도로 학교의 교육 환경 및 교육과정은 정당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그건 절대 아닙니다. 


학교 부적응이라는 용어를 당당히 쓰고자 한다면 아이들이 적응해야 할 학교의 환경은 당연히 적응해야 할 당위성, 즉 바람직하고 타당한 특성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아이들에게 학교의 적응을 당당히 요구하고, 적응하지 못한 아이에게 ‘학교 부적응아’라는 명칭을 거리낌 없이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학교에 대한 비판을 보면 학교 환경은 그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의 학교는 학교 본연의 기능이 왜곡되어 권위주의적 지도 방식으로 순응, 질서, 통제를 강조하고, 성적만을 위한 학교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학교의 특성들이 청소년기 성장에 정작 갖추어야 중요한 사회성과 협조성, 자주성을 키우는 기회를 빼앗고 있거나, 오히려 청소년기에 갖고 있는 순수함이나 자신감을 해치는 역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즐겁게’, 그리고 ‘건전하게’ 성장해야 할 아이들이 비정상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건강하지 못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멀쩡한 아이들이 자퇴를 생각하는 학교,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리고 이 지경까지 왔는데 왜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오히려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한 교육을 한다는 학교가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배움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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